1970년, 떠오르는 일본을 과시한 ‘오사카 만국박람회’
1970년 3월 15일부터 9월 13일까지 일본 오사카부 스이타시(吹田市)에서 열린 일본만국박람회(日本万国博覧会).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국제박람회로 77개국이 참여하였고, 당시 기준으로 사상 최대규모를 자랑했다. 흔히 ‘오사카 엑스포’ 또는 ‘EXPO’70’으로 칭한다.
▲ EXPO’70 기념공원
‘인류의 진보와 조화(人類の進歩と調和)’가 박람회를 관통하는 테마였으나, 결과적으로는 폭발적인 경제성장으로 종전 25년 만에 미국에 이어 세계경제 2위를 달성한 일본의 성장을 자축하고 자국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희망을 보여준 행사로 기억되고 있다. 2차 대전 후 영국에서 열린 영국제와 비슷한 분위기였다고 볼 수 있겠다.
– 관련 글: 1951년 영국제(페스티벌 오브 브리튼)
▲ EXPO’70 공식포스터
1964년 도쿄올림픽에 이어 6년 만에 열린 국제행사로 총비용 6,500억 엔이 소요되었으나 이는 사상 최대의 관람객 6,421만 8,770명(외국인 약 170만 명)이 방문하며 엑스포 사상 최초의 흑자라는 대성공으로 보답을 받았다.
이때 박람회에 선보인 미래의 제품과 서비스는 좌변기의 비데, 무빙워크(autowalk), 모노레일, Local Area Network(LAN), 휴대폰, 인형뽑기 게임, 아이맥스(OmniMax), 캔커피, 패밀리 레스토랑, 전기자전거, 전기자동차, TV전화, 픽토그램을 이용한 안내판 등이었다.
▲ 산요의 ‘인간 세탁기’도 선을 보였으나 상용화되지는 못하였다.
이처럼 지금은 실용화되어 익숙한 것들이 EXPO’70을 계기로 유용성을 인정받아 좀 더 빠르게 일상생활에 퍼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 EXPO’70 심벌마크. 오사카 출신의 그래픽 디자이너 오오타카 타케시(大高猛, 1926~2000)의 작품으로 일본의 국화인 벚꽃에서 따온 것이다. 5개의 꽃잎은 오대주(五大州), 가운데의 원은 일장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세계가 손을 맞잡고 박람회장으로 모인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 일본관의 모습. 건물의 부지면적 3만 7,791㎡는 정확히 일본 국토의 약 1,000만 분의 1에 해당하였다.
중앙에 있는 높이 80m의 탑을 중심으로 5개의 원형건물이 지상에서 6.5m 떠있는 상태로 지어졌으며, 상공에서 보면 EXPO’70의 심벌마크를 본떠 만든 것을 알 수 있었다.
▲ EXPO’70 개회식 모습.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국제박람회였던 만큼 일본은 재외공관을 통해 참가 독려를 하였고 최종적으로 77개국이 참가했다.
개막식은 천황과 황태자비 내외를 비롯한 일반관객 12,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전 11시 NHK교향악단이 국기게양과 함께 일본 국가를 연주하고 참가국을 호명하면 해당국가의 인사말과 함께 참가신청을 한 순서대로 입장식을 가졌다.
▲ 한국대표단의 입장 모습. 지금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촌스러운 한복이다.
참가신청을 먼저 한 5개국은 ‘캐나다-한국-미국-대만-네덜란드’ 순이어서 한국은 두 번째로 입장했다. 한편 대만은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는 정식국호로 참여한 마지막 국제박람회였으며, 베트남공화국(월남)은 지금은 사라진 국가가 되었다.
▲ 일본만국박람회가 개막하기 전 네덜란드관이 건축 중인 모습.
건물 외벽은 지상 4m 50㎝까지 블루, 그 위는 은색, 가장 높은 곳은 오렌지색으로 칠해져 있었으며 지하 1m 40cm 아래에 위치한 중앙홀은 해수면보다 낮은 국가를 상징하고 있었다.
▲ 건축가 로저 헨리(Roger Henley)와 히달고 모야(Hidalgo Moya, 1920~1994)가 설계한 영국관의 모습.
높이 37m의 게이트 4개를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상부에서 보면 유니언 잭을 볼 수 있었다. 전시관 밖에 쓰인 ‘영국’이라는 한자는 당시 오사카부 지사였던 사토 기센(左藤義詮)의 필체.
▲ 미국관은 길이 142m, 너비 83.5m의 타원형 막으로 덮인 공기막 구조로 미국의 우주공학을 과시한 건물이었다.
유리섬유에 염화비닐을 코팅한 와이어로프로 지붕이 펄럭이지 않도록 보강하고 있었으며, 내부에서는 송풍기 4대와 보조 송풍기 2대로 공기압력을 가해 부풀리는 구조. 기압이 정확히 유지되면 지붕에 눈이 18cm로 쌓여도 견딜 수 있는 강도였다.
▲ 박람회장 내의 관람차.
▲ 사방이 보이는 케이블카를 탑승한 관객들.
▲ 박람회 공식 제복을 착용한 직원들.
파란 제복을 입은 직원은 외국어 소통이 가능한 인원이며, 상아색 제복은 돌발상황 발생 시 응급처치가 가능했다. 빨간 제복은 가장 일반적인 직원으로 박람회장 곳곳에서 안내를 맡았다.
▲ 가족단위로 찾은 관람객들. 인파가 몰린만큼 미아도 많이 발생했는데, 1970년 5월 22일 미아발생 1만 명을 돌파했다.
▲ 소련관은 전시관과 레스토랑의 두 건물로 구성되었으며 건물의 돌출된 최고 높이는 109m 50cm였다. 꼭대기에는 소련의 국장에 있는 높이 5m 50cm의 망치와 낫이 설치되었다.
총 입장객 수 2,800만 명으로 1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3위 미국관의 1,650만 명보다 훨씬 많은 숫자. 다만 미국은 워싱턴, 하와이, 알래스카, 샌프란시스코, LA 등이 도시자격으로 따로 참여했고 아메리칸 파크, 코닥, 펩시콜라 등도 별개의 전시관을 선보였다. 박람회 기간 중이었던 1970년 4월 22일은 소련을 건국한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의 탄생 100주년이어서 전시관 내에서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 탄생’을 주제로 레닌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했다.
▲ 호주관은 큰 원형지붕이 공중에 매달린 특이한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사실 물결모양의 건물은 일본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가 그린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神奈川沖浪裏)’를 모티브로 건설되었으며, 원형지붕은 도쿄의 사원에 있던 청동연꽃의 이미지로 설계되었다.
▲ 프랑스관 건물은 4개의 하얀 돔형 건물의 집합체로 프랑스 공모전에서 우승한 작품이었다.
▲ 독일관(서독)의 반구형 돔은 표면의 지름이 30m, 최고 높이는 22.5m였다. 독일의 우수한 건축기술이 적용되어 세계에서 가장 경량으로 여겨졌던 강관과 부재들이 사용되었다.
▲ 원거리에서 본 박람회장. 좌측부터 미국관, 호주관, 독일관이 보인다.
▲ 캐나다관의 외벽은 한 변 50cm의 거울 약 4만 장이 타일로 장식되어 ‘거울의 전당‘이라고 불려졌다. 인파가 넘치는 만큼 약 2,500만 명이 입장해 소련관에 이어 총 관객 2위를 차지했다.
1970년 5월 27일~28일에는 ‘캐나다 데이’에 맞추어 피에르 트뤼도(Pierre Trudeau, 1919~2000) 총리가 방문하였다. 그는 현 총리인 쥐스탱 트뤼도(Justin Trudeau)의 부친이다.
▲ 1970년 6월 29일에 열린 ‘일본의 날’ 행사에는 당시 황태자였던 쓰구노미야 아키히토(継宮明仁)와 동비 쇼다 미치코(正田美智子)가 참석했다. 아키히토는 1989년 천황으로 즉위하였으며, 2019년 고령을 이유로 상황(上皇)으로 물러났다.
▲ 홍콩의 전통배 모양으로 디자인된 홍콩관의 건물 위에는 높이 16m에서 28m의 대형 돛이 1일 2회 펼쳐지는 행사를 가졌다.
1970년 4월 19일에는 관람객 1,000만 명을 달성하였는데 해당 관객에게 만국박람회 입장권 2장과 더불어 홍콩관이 제공하는 홍콩 1주일 여행권이 증정되었다.
▲ 아르헨티나관 근처의 인파. 건물 외벽에는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었다.
▲ 네덜란드관과 아르헨티나관 사이를 지나는 관객. 멀리 소련관도 보인다.
▲ 스위스관의 ‘빛의 나무(光の木)’.
알프스의 눈꽃을 표현한 것으로 두께 5m, 높이 21m의 줄기 위에 사방 55m로 펼쳐지는 빛의 가지가 있었다. 잔가지 끝에 3만 2,036개의 백열전구가 설치되었으며 야간에는 점등되어 환상적인 조망을 자랑했다.
▲ 무지개의 탑(虹の塔) 근처 모습.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된 높이 68m 65cm의 철골 건물로 무지개색으로 칠해졌으며 야간에는 조명이 점등되었다.
▲ 후루카와 파빌리온(古河パビリオン) 주변 야경.
높이 86m의 건물은 1200년 전 나라시대에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의 대불전에 세워진 7층탑을 재현한 것이다. 내부에는 전통적인 탑과 어울리지 않게 컴퓨터와 미래기술이 전시되었는데, 이는 ‘고대의 꿈과 현대의 꿈’이라는 주제를 담은 것이었다.
▲ 태양의 탑(虹の塔). 예술가 오카모토 다로(岡本太郎, 1911~1996)가 디자인한 박람회의 상징이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금빛 찬란한 미래를 상징하는 ‘황금의 얼굴’과 정면에는 현재를 상징하는 ‘태양의 얼굴’, 뒤에는 과거를 상징하는 ‘검은 태양’이라는 3개의 얼굴로 구성되어 있었다.
▲ 태양의 탑 근처를 이동하는 인파. 박람회장에 설치된 모노레일을 탑승한 관람객은 약 3,350만 명에 달했다.
▲ 미도리관(みどり館)의 모습.
지름 46m, 높이 31m의 반구형 돔으로 입체적인 천체를 상영하는 아스트로라마(Astrorama) 시연을 위해 설계되었다. 반구 내부의 전체가 스크린으로 약 1,000명을 수용하는 원형극장과 전시장이 있었으며, 지하 1층은 관리실로 운용되었다.
▲ 도시바 IHI관(東芝 IHI館)의 야경. 이등변 삼각형으로 된 철판을 6장 맞춘 삼각뿔 유닛 1,476개를 용접해 ‘글로벌 비전’이라 이름 붙여진 붉은 돔을 입체적으로 감싸는 형태였다.
▲ 대한민국관(大韓民国館)은 건축가 김수근(金壽根, 1931~1986)이 설계한 건물이었다. 직경 4m, 높이 30m의 원기둥 15개가 철제 트러스트를 받치고 있는 형태로 4층 건물과 종각, 인공연못에 떠있는 거북선의 형태를 한 부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종각에는 신라시대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대형 복제품(높이 3m 30cm)이 설치되었고, 녹음된 장엄한 종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종 앞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4층 본관으로 입장하면 한국의 문화유산이 전시되어 있었고, 3층의 현대전시관에서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전후 복구 등이 미니어처로 소개되었다.
▲ 태양의 탑 옆으로 보이는 대한민국관의 측면. 1층 로비의 무용장에서는 무용가 한영숙(韓英淑, 1920~1989) 단장과 민속무용단 10명이 박람회 기간 내내 민속무용 공연을 선보였다.
▲ 상공에서 본 박람회장의 야경. EXPO’70의 하루 최고 입장객 수는 박람회가 끝나가는 9월 5일의 83만 5,832명이었으며 최저 입장객 수는 박람회 초기인 3월 16일로 16만 3,857명이었다.
▲ EXPO’70의 목표 관객은 3천만 명이었으나 대회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5천만 명으로 상향 조정되었고 최종적으로 6,421만 8,770명을 기록했다. 이는 2010년 상하이 엑스포가 갱신(약 7,308만 명)할 때까지 엑스포 사상 최대의 관람객이었다.
1970년 6월 23일에 입장한 3천만 번째 관람객에게는 유럽일주(10일) 여행권 2장과 20만 엔이 증정되었고, 8월 19일에 입장한 5천만 번째 관람객에게는 세계일주 항공권 2장과 30만 엔이 증정되었다.
▲ 1970년 9월 13일, 초대장을 받은 관객 6,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폐회식이 열린 모습. 회장에 울려 퍼진 폐막식 음악은 ‘반딧불의 빛(蛍の光)’으로 한국에서도 익숙한 멜로디인 스코틀랜드 민요 ‘작별‘(Auld Lang Syne, 올드 랭 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