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대의 간척계획, 아틀란트로파(Atlantropa)
1920년대의 유럽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도래한 시대였지만 재정파탄, 실업, 인구과잉, 에너지원의 고갈이라는 큰 문제에 부딪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유럽제국들은 식민지 경영에도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일부 지식인들은 ‘유럽이 빠르게 유대를 강화하지 않으면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며 마치 미래를 보고 온 듯 정확한 예상을 하기도 했다.
독일의 건축가 헤르만 죄르겔(Herman Sörgel)도 그런 예측을 하는 지식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유럽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분쟁을 막는 해법은 「지브롤터 해협에 거대한 댐을 건설하고 지중해의 물 20%를 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헤르만 죄르겔(Herman Sörgel, 1885~1952)
이 웅장한 프로젝트가 지금까지도 흥미를 끄는 부분은 그 스케일 때문만이 아니라 당대의 엘리트들에게 현실적인 구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아틀란트로파 프로젝트의 출현
대규모 건설프로젝트는 20세기 초반의 정치인들이라면 걸핏하면 꺼내 드는 공약 카드였으며, 과학자와 기술자들도 경제적인 문제들을 거창한 공사로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믿던 시대였다. 실제로 수많은 랜드마크가 이 시기에 건설되었고 초고층빌딩과 거대한 댐, 거미줄 같은 노선의 지하철에 대한 상상은 오늘날 현실로 이루어졌다.
또 1927년에서 1932년 사이에 네덜란드는 인공호수 에이셀 호(Ijsselmeer)에 15km 길이의 댐을 건설하고 토지를 성공적으로 개간하는 등, 자연을 거스르는 간척사업은 기술적으로 가능했으며 망상이 아니었다.
▲ 아틀란트로파 프로젝트 개념도 | Deutsches Museum(1932)
1차 대전의 공포에 휘청거렸던 유럽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갈구했다.
유럽은 전쟁과 1918년의 스페인 독감으로 엄청난 인명손실을 입었지만, 그렇다 해도 1920년부터 1930년까지 인구는 4억 8천8백만 명에서 5억 3천4백만 명으로 증가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가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긴장된 상태를 이어갔다. 옛 제국의 유럽인들은 자신들을 위한 공간이 점점 줄어들어간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레벤스라움(Lebensraum)‘이라는 개념이 힘을 얻어갔다.
레벤스라움은 국가나 민족이 생활과 생존을 위해 필요한 공간적 범위를 뜻하는 지정학적인 용어로, 이는 식민지 확보를 위한 팽창주의로 연결되었다. 인구밀도가 높은 중부 유럽에서는 레벤스라움에 대한 추구는 ‘영토가 부족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졌고, 아틀란트로파는 이 고민을 단숨에 해결해줄 해법으로 보였다.
▲ ‘유라프리카’의 출현
이런 분위기 속에 1928년, 헤르만 죄르겔은 지구의 표면을 완전히 바꿔버릴 수 있을 정도의 규모의, 초기에는 ‘판로파(Panropa)’라고 칭해졌던 ‘아틀란트로파 프로젝트(Atlantropa Project)‘를 발표했다.
아틀란트로파 공사내용
▲ 지브롤터 댐 건설 상상도
공사는 크게 다음과 같이 구상되었다. 오랜 구상을 한 프로젝트답게 죄르겔은 대규모 공사 외에 부수적인 공사는 물론 바닷물의 염분 계산에서부터 기후 데이터, 도시계획, 선전 포스터, 영화, 교향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들을 남겼다.
1.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지브롤터 해협에 댐을 건설. 해협의 가장 좁은 부분이 아닌 가장 얕은 부분을 최적의 공사지로 선택했으며 댐의 높이는 300m, 너비는 2.5km로 설계되었다.
2.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마르마라 해에서 유입되는 해수를 막기 위해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 Strait)에 댐을 건설한다.
3. 지중해 한복판에 있는 시칠리아 섬을 중심으로 시칠리아~이탈리아, 시칠리아~튀니지 사이의 바다를 댐으로 막아 지중해의 수위를 서쪽은 100m, 동쪽은 200m 낮춘다. 이렇게 수위를 낮춤으로써 대서양에서 지중해로 흘러드는 물의 낙차를 이용해 수력발전을 하게 된다.
4. 수위가 낮아지면 수에즈 운하는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에 수에즈 운하를 지중해 쪽으로 확장한다.
5. 운하도시 베니스(베네치아)의 보존을 위해 아드리아 해에서부터 베니스까지 운하를 파서 물이 흘러들어 가도록 한다.
6. 튀니지와 시칠리아 사이에 놓인 댐의 상부에 고속도로를 만들어 아프리카와 유럽을 연결. 프랑스 파리에서 세네갈 다카르까지, 베를린에서 남아공의 케이프타운까지 연결한다.
7. 아프리카의 아무 쓸모없는(?) 밀림을 없애고 콩고강에 댐을 건설한다. 차드 호수의 수위를 높여 나일강과 같은 새로운 강을 만들고 염분을 제거하고 관개 작업이 끝난 사하라 사막에서 농지를 얻는 것이 목표였다.
▲ 새롭게 형성되는 해안선과 지형
아틀란트로파 프로젝트는 현대환경운동가들과 생태학자들이 보면 경악할만한 공사지만, 죄르겔은 환경에 미치는 영향 또한 긍정적으로 내다보았다.
그는 지중해는 애초에 물로 덮여 있지 않는 곳이었고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 대서양의 물이 범람해 들어온 것이라고 믿는 학파였기 때문에 아틀란트로파는 간척이 아니라 예전 모습으로의 ‘복구’공사라고 주장했고 기후변화에도 유익할 것으로 생각했다.
▲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의 아틀란트로파 댐 스케치(1931)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아틀란트로파는 망상에 가깝지만 죄르겔 부류들은 매우 진지했다.
그들은 이 프로젝트에 대해 일부 정치인을 비롯해 한스 푈치히(Hans Poelzig),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 프리츠 회거(Fritz Höger), 한스 될가스트(Hans Döllgast), 코르넬리스 판에이스테런(Cornelis van Eesteren)과 같은 저명한 건축가들의 지지를 얻어내기까지 했다.
아틀란트로파의 목표
아틀란트로파는 크게 두 가지 목표를 추구했다.
우선 새로운 영토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건설로 프랑스의 농업면적보다 큰 약 660,300 km²의 땅이 새롭게 생겨날 것으로 계산되었다.
죄르겔은 독일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유대인이 아닌 아시아’라고 믿는 학자였고 앞으로의 세계가 크게 세 가지 세력(미국, 아시아, 아틀란트로파)으로 분할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유럽이 떠오르는 미국과 아시아에 맞서기 위해서는 자급자족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실업과 인구과잉의 해소를 위해서도 영토를 넓히는 것이 급선무라고 본 것이었다.
▲ ‘노란 위험(The Yellow Peril)’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자는 삽화 | Haper’s Weekly(1895)
프로젝트에는 댐을 통한 수력발전 외에도 다리, 터널, 철도, 항만 등 초대형 인프라 건설이 포함되었고 신도시 계획도 구상되었다.
하지만 이 계획들은 지중해의 수위가 낮아지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고 바닷물의 수위 하강은 자연 증발을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에 120년 정도가 지나야 구상한 모든 목표의 달성이 가능했다. 또 아프리카 끝까지 철도노선이 놓이는 최종단계까지는 총 250년이 걸릴 것으로 예측했다.
▲ 베를린-로마-나폴리-튀니지-케이프타운을 잇는 철도
결국 죄르겔이 처음으로 계획을 주창한 1928년부터 공사를 시작했다고 쳐도 2177년이 되어야 아틀란트로파가 완성되는 것. 그는 이를 250년간 일자리 걱정을 해결해줄 황금열쇠로 생각했지만 초장기적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재정지출과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리스크를 짊어지는 것은 유럽 국가들에게는 모험이었다.
하지만 아틀란트로파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유럽이 거대한 인프라를 공동 관리하면서 상호의존적이게 되고 어느 한 국가에 과도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전쟁위협이 종식된다’는 지금의 EU를 연상시키는 세계관이었다. 또한 초대륙건설에는 천문학적인 돈이 투자되므로 프로젝트에 참여한 유럽 국가들은 전쟁자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평화로워진다는 부수적인 효과도 기대되었다.
결국 몽상에 그친 아틀란트로파의 한계
죄르겔은 아틀라트로파 프로젝트에서 환경과 동식물에는 꽤 신경을 썼지만 정작 아프리카 ‘사람’들은 안중에 없었다. 세상을 체스판처럼 보며 미래를 바라보는 비전에도 불구하고 국적과 인종에 대해서는 구식 편견에 사로잡혀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콩고강을 범람시켜 새로운 나일강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 주변에 현재 살고 있는 수천만명의 생존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이처럼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유럽인의 지적, 도덕적 우월성을 믿는 백인이었다. 아프리카는 당시의 유럽 중심적 식민 논리에 따라 ‘아무도 살지 않는, 바로 이용 가능한 비어있는 땅’으로 설정되었던 것이다.
‘아틀란트로파로 유럽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죄르겔의 생각은 아프리카의 자원과 노동력을 더 효율적으로 유럽을 위해 소진하겠다는 구상에 불과했다는 점이 한계였다.
▲ 공사로 인해 아프리카 대륙 가운데에 생겨날 콩고 호수(Congo Lake)와 차드해(Chad Sea)
이후의 결과는 이미 알고 있듯이 지브롤터에는 댐이 건설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공사 자체는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전 유럽이 협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죄르겔의 고향에서만 열정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뿐, 애초에 이탈리아가 제노바나 나폴리처럼 유서깊은 해양도시를 내륙도시로 만들자는 계획에 찬성할리가 없었다.
실제로 공사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북유럽 언론은 ‘프로젝트가 가능하다’는 논조였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언론들은 ‘농담이나 미친 환상’이라며 조롱했다.
▲ 지중해 수위가 하강했을 때 변형되는 이탈리아 영토
어쨌든 죽음과 전쟁으로 치닫는 유럽인들을 보다 건설적이고 평화로운 길로 이끌자는 이 계획에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흥미를 보인 것은 나치가 집권할 때까지였다.
1933년 독일 선거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승리하자 죄르겔은 나치가 아틀란트로파를 지원하길 원했지만 제3제국은 유럽 국가들과 협력할 마음이 없었고 히틀러의 관심은 남부 유럽이 아닌 동부 유럽이었다. 또한 유대계 여성과 결혼한 죄르겔은 그의 눈에 들기 힘든 학자였다.
▲ 아틀란트로파의 미래 수도로 거론된 모로코 탕헤르(Tangier)의 1932년 전경
결과적으로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유럽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전쟁이 날 것’이라는 그의 예측만은 적중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죄르겔의 계획은 완전히 망각되었고, 전후에도 수력보다 더 나은 에너지원인 원자력이 발명된 데다가, 더불어 식민주의가 구시대의 물결로 흘러감에 따라 프로젝트는 공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완전히 의미를 잃게 되었다.
▲ 헤르만 죄르겔의 서재
명색이 건축가였지만 죄르겔은 자신을 대표할만한 건축물이라 할만한 자취를 거의 남기지 못했다.
평생을 올인한 아틀란트로파 프로젝트를 지치지 않고 주창하던 죄르겔은 1952년 크리스마스에 강의를 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뮌헨의 프린츠레겐텐 거리(Prinzregentenstraße)에서 뺑소니 차량에 치어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리고 초대륙 아틀란트로파도 그날 그와 함께 완전히 생명을 잃었다.
Reference:
• Alexander Stumm, ‘Neo-colonial Continuities in the Mediterranean Infrastructure Projects of Atlantropa and Desertec‘
• P.N. Lehmann, ‘Infinite Power to change the World: Hydroelectricity and Engineered Climate Change in the Atlantropa Project‘
• Peo Hansen & Stefan Jonsson, ‘Eurafrica: The Untold History of European Integration and Colonialism-Chapter 2. A Holy Alliance of Colonizing Powers: The Interwar Peri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