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웃지않는 고아, 이강용

1951년 봄, 미 제1기병사단 제7연대의 정찰대가 서울에서 북쪽으로 24km 떨어진 의정부의 한 마을을 순찰하고 있었다.

 

유엔군과 중공군의 격전지였던 이곳은 포격으로 폐허로 변해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곳을 대부분은 서둘러 지나쳤지만 호기심 많은 병사가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운 방에는 겁에 질린 한 아이가 알몸으로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5살 이강용이었다. 옆에는 죽은 지 며칠이나 지난 것인지 부패한 여성의 시신이 있었고 파리떼가 들끓었다. 아마도 강용이의 엄마였을 것이다.

 

미군 병사는 지체 없이 강용이를 들어 어깨에 들쳐 메고 연대 의무대로 귀환했다. 아이는 엄마가 누워있는 집을 향해 팔을 뻗은 채 눈물을 흘렸지만 얼마나 굶었는지 울음에는 소리가 없었다.

 

고아원에 맡겨진 강용이는 다른 고아들과 어울리지 않고 늘 침울하고 공허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라이프 매거진의 마이크 루지에(Mike Rougier) 기자는 아이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웃지 않는 꼬마(The Little Boy Who Wouldn’t Smile)’라는 제목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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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지않는 꼬마’ 1951. 【사진: Mike Rougier】

 

1951년 봄, 미 제1기병사단 제7연대의 정찰대가 서울에서 북쪽으로 24km 떨어진 의정부의 한 마을을 순찰하고 있었다. 3
▲ 맞는 옷이 없어 군복상의를 입고 있는 이강용

 

1951년 봄, 미 제1기병사단 제7연대의 정찰대가 서울에서 북쪽으로 24km 떨어진 의정부의 한 마을을 순찰하고 있었다. 5
▲ 이강용은 고아원에서 가장 어렸다.

 

1951년 봄, 미 제1기병사단 제7연대의 정찰대가 서울에서 북쪽으로 24km 떨어진 의정부의 한 마을을 순찰하고 있었다. 7
▲ 전쟁고아의 상징이 된 모습


1951년 5월, 어린 나이에 큰 일을 겪은 이강용의 정신건강을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시설이 좋은 곳이 낫다는 판단하에 대구 고아원으로 옮기기로 결정되었다.

 

1951년 봄, 미 제1기병사단 제7연대의 정찰대가 서울에서 북쪽으로 24km 떨어진 의정부의 한 마을을 순찰하고 있었다. 9
▲ 1951년 6월, 대구 고아원의 이강용

 

1951년 봄, 미 제1기병사단 제7연대의 정찰대가 서울에서 북쪽으로 24km 떨어진 의정부의 한 마을을 순찰하고 있었다. 11
▲ 대구 고아원에서도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모습


대구 고아원 직원들은 강용이를 미소 짓게 하는 것이 중요한 하루의 일과였다.

 

어느 날 고아원의 보모가 강용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었을 때 아이는 “지푸(지프) 타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보모는 네가 웃으면 지프를 태워주겠다고 약속했고, 그제야 강용이는 웃었다. 고아원 사람들 모두가 기다리던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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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아원 보모들의 노력으로 웃음을 되찾아가는 모습

 

1951년 봄, 미 제1기병사단 제7연대의 정찰대가 서울에서 북쪽으로 24km 떨어진 의정부의 한 마을을 순찰하고 있었다. 15
▲ 마이크 루지에 기자와 이강용


1년 후 링컨저널스타(Lincoln Journal Star)의 멕스 헤일(Max Hale) 기자가 대구 고아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만난 강용이는 늘 미소를 짓는 아이가 되어 있었고, 기자는 이번엔 ‘웃음을 멈추지 않는 소년(The Boy Who Couldn’t Stop Smiling)’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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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boy who couldn’t stop smiling’ 1952 【사진: Max Hale】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고아로 미국 사회에 소개되었던 이강용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1956년 4월, 라이프 매거진은 LA에 거주하는 코델 레퍼(Cordelle Lefer) 여사가 이강용의 사진을 보고 입양을 결정했다는 기사와 함께 미국에 온 그의 모습을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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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엄마 코델 레퍼 여사와 이강용.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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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이공원 방문과 전화를 처음 써보는 모습.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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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를 보는 이강용. 1956

 

이후 1960년 10월 미국 생활에 적응하고 전쟁의 기억을 완전히 떨쳐버린 듯한 이강용의 환한 미소가 사진으로 볼 수 있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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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의 생활.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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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한 미소의 이강용. 1960

 

현재 온라인에는 이강용의 이름이 ‘이강구(Kang Koo Ri)’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떠돌고 있기도 하다.

 

그가 미국으로 입양되었을 당시 라이프 매거진의 기사에는 ‘이강용(Ri Kang Yong)이라고 분명히 적혀있는 것으로 볼 때 초기 마이크 루지에 기자의 보도에 실수가 있었거나 글이 여러 번 옮겨지는 과정에서 철자를 잘못 적는 오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Kang Yong Ri는 1964년 미국에 귀화하면서 서류에 Kang Yong Lee라는 이름으로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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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양기사에서 볼 수 있는 이름 ‘Ri Kang Yong’

 

족보 정보를 제공하는 사이트 familysearch에 따르면, 이강용의 양모 코델 레퍼(Cordelle Lefer) 여사는 1972년 11월 23일 사망하였다. 그를 입양한 지 12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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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델 레퍼 여사의 사망정보

 

이후의 정보를 가계도 사이트인 ancestry.com에서 찾아보면 이강용은 1982년 6월 26일에 결혼했고 세 아들을 두었다. 해당 인물이 1945년 10월 6일 경기도 의정부 출생, 코델 레퍼의 아들이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글의 주인공인 이강용이 맞을 것이다.

 

‘웃지 않는 고아’에서 극적으로 환한 웃음을 되찾았던 그는 지금쯤 70대 후반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제는 많은 자손들에게 둘러싸여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는 노년을 보내고 있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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