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출신 슈퍼모델, 조흐레 에스마엘리(Zohre Esmaeli)

지난번 아프가니스탄 출신 여성 연예인들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여자 배우와 가수들)

 

해당 글에 등장하는 슈퍼모델 조흐레 에스마엘리(Zohre Esmaeli)가 최근 잡지 글래머 온라인에 어린 시절 고국을 탈출할 때의 수기를 실었다. 그녀는 아프가니스탄 출신 최초의 슈퍼모델이자 지난 20여 년간 ‘유일한’ 슈퍼모델이기도 하다.

 

나는 13살에 아프가니스탄과 탈레반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썼다. 이것은 나에 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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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흐레 에스마엘리


2021년 8월, 탈레반이 카불을 장악하면서 아프간 대통령은 국외로 탈출했고 정부는 붕괴됐다. 탈레반의 재집권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을 다가올 새로운 삶에 대해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카불에 숨어있는 가족들로부터 WhatsApp을 통해 돌아다니는 섬뜩한 비디오들이 매일 보내져 온다. 길을 가다가 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이유 없이 채찍질을 당하는 여성들, 대낮에 총에 맞아 죽는 아프간 정부군들도 있다.

 

몇 주 동안,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지 몹시 불안해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탈레반은 자신들이 변했다고 말하며 아프간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거의 없다. 이미 여성들은 직업을 빼앗기고 광고 속에서는 제거당했으며 12세 소녀들이 집에 있다가 납치되었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비록 내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쫓겨난 지 22년이 흘렀지만, 1994년 탈레반이 집권한 후 내 삶이 얼마나 빨리 변했는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더 이상 보호자 없이 외출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가는 곳마다 부르카를 입어야 했다. 심지어 내 사촌은 시장에서 오렌지를 사려고 손을 뻗다가 손톱에 네일아트를 한 것이 발각되었을 때 거리에서 채찍질을 당해야 했다.

 

탈레반 통치하에서 돌에 맞아 죽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사람들을 확성기로 불러 모아 처형 장면을 스포츠 경기장에 모여서 관전하게 만들었다.

 

우리, 특히 여성들은 공포와 억압 속에서 살았다. 소녀들은 스포츠를 하거나 학교에 가는 것이 금지되었기에 나는 집에 있는 카펫을 쓸고 손으로 빨래나 해야 했다.

 

예전 같으면 손님이 오면 내가 차를 끓였겠지만 나는 타인에게 보이거나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어느 날 친구 재스민이 와서 던진 농담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아버지는 벌로 나를 채찍질했다.

 

무서운 여행


우리 가족이 카불에서 탈출하던 날 밤, 내가 기억하는 것은 트럭에 씌워진 청색 방수포와 우리 여덟 명(나, 아버지, 계모, 동생 살림, 언니 미나, 그리고 언니의 남편과 그들의 두 아기)이 그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모습뿐이다. 이틀 뒤 이란 마슈하드에 도착해 가스레인지와 의자 1개, 침대 4개가 있는 방에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출발 전 그 여정을 굉장한 모험이 될 거라고 묘사했었다. 우리는 기차, 버스, 자동차를 타고 친척들이 있는 독일에 도착하기 위해 10개국을 거쳤다.

 

당시 나는 13세였고 아버지가 브로커에게 지불하는 데 필요한 돈(1인당 약 650만 원)을 마련하기 위해 살림살이를 모두 팔아치우는 것을 4주 동안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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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세 무렵의 조흐레


이란에서 시작한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모스크바에 있는 모스크였다. 창문은 깔개들로 가려져 비좁은 방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소변과 땀의 악취가 공기 중에 스며들었다. 우리는 2주 동안 샤워도 하지 않고 변기 하나만 있는 그곳에 갇혀 있었다. 난민들이 지금까지의 여정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나누면 아기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브로커들은 바로 움직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두고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에 나는 항상 세 벌의 바지를 껴입고 잠을 자면서 불안감에 빠져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헝가리로 이동했는데, 대부분 차를 타고 갔지만 종종 걷기도 했다. 러시아 군인들의 검문에 걸렸을 때 남자들에게 옷을 벗으라고 강요하고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는 동안 돈을 찾아 강탈하던 모습이 사진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 다행히도 새엄마는 속바지 춤에 만들어놓은 주머니에 현금을 숨겨놓고 있었다.

 

또 다른 날 밤, 체코 어딘가에서는 무릎까지 쌓인 눈밭을 헤집고 다녔다. 우리는 브로커를 따라 몇 시간을 걸어 길을 가로막고 있는 강에 다다랐고 한 번에 네 명씩 타이어와 밧줄을 이용해 건너야 했다. 추위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우리 중 누구도 수영을 할 수 없었지만 그날 아버지는 마치 용맹한 수사자와 같은 존재였다. 그의 강인한 면모는 내가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집을 떠난 지 거의 7개월 만에 독일 국기의 검정, 빨강, 금색이 길가에서 펄럭이는 것이 보였고 마침내 나는 우리가 독일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아름다운 독일이여! 우리가 왔어!”라고 외치며 스카프를 벗었다.

 

운전사는 사촌이 마중 나오기로 한 바이에른의 주유소에 우리를 내려놓고 떠났다. 마침내 그날 밤 사촌의 아파트에서 안전하게 머물 수 있었다. 나는 가족들 중 가장 먼저 목욕을 했는데 몸을 씻어낸 욕조의 물이 땟물로 까맣게 물들었다.

 

새로운 삶


난민 신청을 한 뒤 프랑크푸르트 인근 쉬발바흐암타우누스(Schwalbach am Taunus)에 주택을 배정받기 전에는 카셀(Kassel) 난민촌의 개조한 컨테이너에서 살았다. 
그곳에는 미나 언니의 가족을 위한 방 하나와 우리를 위한 방 두 개가 있었는데, 목욕탕과 부엌은 다른 가족과 공용으로 썼다.

 

여동생 살림과 나는 학교에 다녔고 독일어를 빨리 배워 부모님을 위해 통역가 역할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독일인 사회복지사가 사탕과 옷을 선물로 들고 들렀는데, 학교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칭찬을 해주곤 했다.

 

독일에서 나는 여자 경찰을 처음 본 순간 완전히 넋을 잃었다. 여자가 그런 위치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아버지는 난민지위 때문에 일을 못하게 되어 지루하게 집에 머물러야 하는 좌절을 겪었다. 나는 용돈을 벌기 위해 술집에서 설거지를 하고 알디(Aldi, 독일의 할인점)에서 쇼핑을 했다. 고국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물건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예를 들면 20가지 종류 이상의 요구르트 같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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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흐레 에스마엘리는 작가, 디자이너로도 활동 중이다.


16세 무렵, H&M 매장을 둘러보던 중 한 여자가 다가와 나에게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 말에 매우 놀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성은 미인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었고 모델 유망주를 캐스팅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사진을 찍어보자고 제안했고 함께 모델 에이전시로 갔다.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모델일을 하면 어떨까’라고 물었더니 당연하게도 싫다고 하셨다.

 

나는 갑자기 여전히 아프가니스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나는 독일에서도 친구들과 함께 외출하거나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휴대폰으로 남자들과 이야기하지 못하게 감시되었다.

 

어느 날 언니가 ‘너와 결혼할만한 아프간 남자를 찾았어’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이곳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후 나는 짐을 싸서 탈출을 도와주기로 한 친구 비욘이 있는 슈투트가르트로 도망쳤다.

 

안개가 자욱한 새벽 5시에 가족들을 뒤로 한채 떠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탈출할 때보다 더 힘들었지만 자유롭게 살고 싶은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가출 이후 나는 곧 수영을 배우고 배드민턴을 치고 친구들과 영화관에 가는 ‘금지된 모든 것’들을 누렸다. 자신감이 커지자 나는 모델 사진을 찍기 위해 온라인에서 사진사를 고용했다. 촬영이 끝나자 결과물에는 반짝이는 머리와 핑크색의 입술을 한 알아볼 수 없는 인물이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나였고 나는 사진 속에서 미소 짓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유의 얼굴


18세가 되자 나는 모델 에이전시와 계약을 했고 밀라노, 로마, 런던으로 보내졌다.

 

2003년에는 독일 가구업체 ‘Bretz’가 처음으로 광고를 제안했다. 이후 수많은 광고를 찍으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뉴욕의 클럽에서 제이 지(Jay-Z)와 비욘세(Beyonce)의 옆 테이블에 앉았던 밤처럼 가족들과도 마주 앉아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나는 가출 후 도착했던 슈투트가르트 기차역과 보그에서 나의 첫 광고를 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자유’라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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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흐레는 2004년 뮌헨에서 열린 미인대회에 아프가니스탄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에게 모욕감을 안겨주고 아버지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드렸다는 것은 분명했기에 늘 죄책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결국 집을 떠난 지 1년 만인 2004년에 나는 화해를 바라며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우리는 그날 오후에 만나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내가 얼마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 말했고, 그는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베를린에서 클럽에 나가 자유롭게 춤을 추며 미친 듯이 웃는 독신여성인 딸의 삶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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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퍼모델 조흐레 에스마엘리


모델 생활을 시작할 때, 내 매니저는 가끔 내가 어디 출신인지 알면 고객들이 꺼려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브라질 출신’이라고 말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아프간 유산이 자랑스럽기에 거절했다.

 

그런데 요즘은 핸드폰으로 아프간의 영상을 보고 유럽과 북미에 도착하는 난민들을 볼 때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난민들은 지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데 한참 동안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TV를 통해 나는 카불에서 시위가 금지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노동권과 정치적 지위를 요구하는 새로운 세대의 여성들이 거리로 나서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최루탄을 맞으며 강경진압을 당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탈레반을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행진하는 그들의 용기 있는 모습을 통해 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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