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와 북한의 선전도구, 영화배우 문예봉의 삶

잡지에 등장한 19세 문예봉

 

– ‘내가 걸어온 길, 문예봉’

 

내 고향은 함경도 함흥이외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날마다 눈물로 지내다가 14살에 아버지를 따라 극단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도 아마 어머니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신 까닭인가 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의 우리 집은 몹시 쓸쓸했으며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허공에 떴습니다. 하늘이 높아지고 세상이 넓어진 것 같았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적소리가 왜 그다지 내 마음을 움직였는지 몰라요.

 

두해 동안을 극단에 따라다녔습니다. 얼마 길지 못한 세월이었으나 갖은 파란과 곡절을 겪었습니다. 밥값 때문에 야간도주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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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의 문예봉 | 1936.02.22 경성촬영소

 

결혼은 열여섯 되던 봄, 4월에 했습니다. 내가 영화계로 발을 옮기게 되고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출연하게 된 것은 나운규 씨가 우연한 기회에 나를 발견해주신 덕택입니다. 그러나 곧 어린아이의 어머니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되었으므로 나는 부득이하게 집안에 들어앉았지요.

 

나이 겨우 열일곱에 남의 어머니가 되기에는 정말 많은 노력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조선에 태어난 연극인이나 영화인의 생활이라면 대개 여러분이 짐작하시겠지만 세 식구가 살아가노라니 아주 철부지인 나는 고사하고 남편의 고생이 어떠하였겠으며 마음이 얼마나 상하였겠습니까. 때때로 나는 밝지 못한 전등 아래에 잠든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음을 태웠습니다.

 

어린애도 자라고 나도 건강해지자 또 영화계에 나와서 안석주 원작, 박기채 감독, 양세웅 촬영의 ‘춘풍’에 출연하게 된 때는 작년 여름 이외다. 어린애를 두고 다니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고 데리고 다니자니 고생스럽고 어쨌든 땀도 무던히 흘렸던가봐요.

 

벌써 그 여름도 지나고 다시 봄이 돌아왔습니다. 싸늘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봄 기분이 떠돌고 들창 너머 보이는 나무에 싹이 돋는 듯합니다. 옆방에서는 ‘아리랑 고개’가 어쩌니 ‘장화홍련전’이 이렇니 하고 떠들어댑니다. 어느 것이나 내가 출연한 영화라 귀가 그쪽으로만 쏠리는데요. 【잡지 ‘여성’ 1936.04.01】

 

문예봉의 해방 이후 삶


문예봉(文藝峰, 1917~1999)은 일제시대의 배우로 본명은 문정원(文丁元)이다.

 

연극무대에서 재능을 보이며 언론의 주목을 끌다가 ‘임자 없는 나룻배(1932)’에 나운규와 출연하면서 영화배우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는데, 돌연 이른 나이(1933년)에 임선규와 결혼하면서 몇 년간 배우 생활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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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데뷔전의 14세 문예봉 【1931.07.12 동아일보】


출산 후 조선 최초의 유성영화였던 춘향전(1935)으로 복귀하였으며 잇달아 박기채 감독의 춘풍(1935), 아리랑고개(1935), 장화홍련전(1936), 미몽(1936)등에 다작 출연하며 전성기를 열었다.

 

특히 장화홍련전은 아버지 문수일과 함께 연기를 펼쳤는데, 이는 조선 최초의 부녀 출연작으로도 기록되는 등 초기 영화배우인 만큼 각종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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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향전 신문광고 【1935.10.04 조선일보】


조선일보사가 발간한 잡지 ‘여성’에 그녀가 기고한 위의 ‘내가 걸어온 길’ 칼럼이 바로 한창 인기정점에 오른 당시의 모습이다.

 

이후 태평양전쟁시기에는 친일 예술활동을 펼치기도 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남로당 활동을 하던 이력으로 입지가 불안해지자 남편과 함께 월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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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해협(1943)에 출연한 문예봉(좌), 오른쪽은 김신재(金信哉)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한국전쟁 중에는 인민군 위문공연 등을 활발하게 하였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52년 제정된 북한 공훈배우(인민배우 아래 단계) 칭호를 그 해 최초로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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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 위문공연을 위해 서울에 등장한 문예봉


현재 한국에서는 친일행각에 더해 월북인사로 금기된 배우지만, 북한은 문예봉의 선한 현모양처로서의 이미지가 체제 홍보효과에 이득인 것으로 판단해 환대를 하였고 배우로도 계속 중용하였다.

 

하지만 김일성의 반일투쟁을 통해 독립을 이룩했다는 역사를 가르치는 북한 입장에서 인민최고배우의 친일행적은 감추고 싶은 흑역사이기 때문에 문예봉이 일제 말기의 선전영화에 출연한 경력은 북한 쪽에서는 완전히 삭제되어 일제통치에 저항한 독립투사로 인식되어 있다.

 

전쟁 후에도 ‘빨치산 처녀(1954)’등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북한 정권 초기 대표 배우이자 정치적 인물로 자리를 확고히 하였으나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 북한도 문화예술계를 장악했던 젊은 김정일이 부르주아 사상이 남아있다는 빌미로 원로배우들을 대거 숙청하면서 문예봉도 영화계에서 강제 은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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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치산 처녀(1954)에 출연한 문예봉. 처형 직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는 장면이다.


이후 신상옥-최은희 납북사건(1978)이 일어나면서 그들에게 원로배우들이 안락한 노후를 보내는 것을 보여주고자 재심사를 하였고 복권되어 1980년작 춘향전에 출연하였다. 당시 노동신문에는 나운규의 ‘아리랑’에 출연했던 여배우 신일선이 남한에서 병마와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는데, 함께 출연했던 문예봉이 안락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대비해서 보여줌으로써 체제선전의 효과를 노렸다는 추정도 있다.

 

1982년에는 김일성 70회 생일을 맞아 인민배우 칭호를 수여받았고, 80회 생일에는 김정일로부터 생일상을 받는 등 평양연극영화대학(平壤演劇映畵大學)의 교수로 재직하던 중 간간히 한국의 뉴스 화면에도 등장하며 북한 정권에 대한 충성심 어린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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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고위급회담에 등장한 문예봉 1991.10.23


독립 전에는 일제를 위해, 독립 후에는 북한의 선전도구로 사용되었던 문예봉은 1999년 3월 26일 사망해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참고문헌:
• 朝鮮日報社 여성 1-1호. 문예봉 (193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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