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과거의 올림픽 종목과 진입을 노리는 미래의 종목
하계올림픽이 어느덧 32번째 대회를 맞았다.
새롭게 추가되는 종목들에 대해서는 단체의 규모나 경기인구수를 놓고 ‘과연 정식종목으로의 자격이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과거 올림픽에서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많은 종목들이 추가되거나 폐지되는 사례를 겪어왔다.
1. 정식종목이었으나 폐지된 종목
줄다리기(Tug of war)
줄다리기는 1900년부터 1920년까지 5개 대회의 정식종목에 있었다(1916년 대회는 1차 대전으로 취소).
팀당 8명이 5분간 대결해 중앙선에서 1.82m이상 끌어당기면 우승하고 그 이상을 끌어당기지 못하면 연장전에 들어갔으며 그래도 승부가 나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더 많이 끌어당긴 팀이 이기는 방식이었다.
▲ 1900년 파리올림픽 줄다리기 경기 모습
현대의 운동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종목이지만 아무래도 기술적인 요소가 다른 종목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고 단조롭다는 부분이 퇴출의 빌미가 되었다. 올림픽에 있던 시절에는 육상경기에 포함되었으나 현재는 별개의 종목으로 분류된다.
바스크 펠로타(Basque pelota)
1900년 파리올림픽에 등장한 바스크 펠로타는 벽을 향해 공을 튀겨 상대방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스쿼시와 비슷하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전통 운동. 당시 파리 서쪽의 교외도시 뇌이쉬르센(Neuilly-sur-Seine)에서 바스크 펠로타 대회가 열렸다. 프로 부문과 아마추어 부문으로 나누어 열렸는데, 프로 부문은 1,000명 이상의 관중들이 들어와 관람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 바스크 펠로타 경기모습
프로 부문에 프랑스 껑보레방(Cambo-les-Bains)의 대표팀과 스페인 마드리드의 두 팀이 참가하였으며, 스페인이 우승을 차지했다. 또 아마추어 부문에도 프랑스와 스페인이 참가했지만 경기전 프랑스가 기권하면서 스페인이 우승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시범종목으로 복귀한 바 있고 2023 팬아메리칸 게임에서는 정식종목인 만큼 호시탐탐 올림픽 귀환을 노리는 종목 중 하나이다.
싱글스틱(Singlesticks)
▲ 싱글스틱을 훈련 중인 미 해군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 등장한 싱글스틱은 두 명의 선수가 겨루는 일종의 목검 펜싱으로 펜싱의 세부종목이었다. 당시 단 3명의 선수만이 참가하였는데 앨버트슨 반조 포스트(Albertson Van Zo Post, 1866~1938)가 우승했다.
앨버트슨은 사브르와 에페에서도 동메달을 땄고 플뢰레 단체전에서는 금메달을 획득했다.
▲ 앨버트슨 반조 포스트(앉아있는 인물)
앨버트슨은 미국 국적이었지만 쿠바를 대표해 출전했고 IOC 데이터베이스에도 쿠바선수로 기록되어 있다.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참가 선수들의 국적은 대부분(81%) 미국이었지만 당시 규정상 본인이 원하는 국적으로 등록해서 출전이 가능했다.
일부 자료를 보면 ‘싱글스틱은 머리를 때려서 피가 나면 승리하는 경기였다(?)’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애초에 진검이 위험해서 고안된 ‘훈련용 펜싱’이 싱글스틱이기에 이는 논리상 맞지 않다. 또한 격투종목 특성상 사고로 출혈이 발생하는 경우는 있었겠지만 ‘출혈=승리’라는 것은 고대 올림픽이라면 몰라도 근대 올림픽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이다.
싱글스틱이 생겨난 초창기나 혹은 ‘출혈하면 승리’라는 규칙을 정해놓은 일부 대회라면 그런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의 싱글스틱 경기는 포인트제가 도입되고 있었다.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역시 출혈과는 상관없이 금메달(11점), 은메달(8점), 동메달(2점)으로 포인트에 따라 순위가 정해진 것을 남아있는 기록으로도 볼 수 있다.
▲ 1904 올림픽 싱글스틱 순위표
다인승 사이클(Tandem)
사이클의 세부종목인 남자 2,000m 탠덤은 1908년 로마 올림픽에 첫 등장한 후 1920년부터 1972년까지 경쟁했다. 현재는 사라졌지만 패럴림픽 사이클 종목에서는 볼 수 있다.
▲ 1908년 올림픽 금메달 모리스 쉴르(Maurice Schilles)와 앙드레 오프레이(André Auffray)
역도 양손 들기(two hand lift), 한 손 들기(One Hand Lift)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 역도의 세부종목으로 양손을 이용하는 투 핸드 리프트(two hand lift), 한 손으로 드는 원 핸드 리프트(One Hand Lift) 두 종목이 실시되었다.
▲ 역도 한 손들기, 두 손 들기
1896년에 이어 두 번째 대회였는데 투 핸드 리프트는 용상과, 원 핸드 리프트는 인상과 비슷하였고 결국 종목 간소화 정책으로 정리되었다.
승마 멀리뛰기(Long jump), 승마 높이뛰기(High jump)
처음으로 승마종목이 도입된 것은 1900년 파리올림픽이었다. 당시 현재는 볼 수 없는 승마 높이뛰기와 멀리뛰기가 시행된 유일한 대회로 남아있다.
▲ 1900년 올림픽, 도미니크 가르데레스(Dominique Gardères)와 라이더의 높이뛰기 모습
높이뛰기는 1.85m, 멀리뛰기는 6.10m의 생각보다 저조한 기록이 확인되는데, 이는 대회 당일 내린 비로 승마장이 진흙탕이었기 때문이다.
달리는 타깃 ‘사슴’ 속사(Running Deer Shooting)
아래에 나올 살아있는 비둘기 사격과는 달리 다행히 살아있는 사슴이 사용되지는 않았다. 대신 세 개의 동심원이 그려진 빠르게 움직이는 사슴 모형이 사용되었다.
▲ 사슴 모형을 나르는 모습
1908년 첫 정식종목으로 등장한 이래 1948년까지 올림픽에 남아있었다.
비록 종목은 사라졌지만 올림픽 대회의 역사로 남아있는 부문이 바로 스웨덴 출신의 오스카 스반(Oscar Swahn)이 남긴 최고령 기록이다.
▲ 오스카 스반(Oscar Swahn, 1847~1927)
그는 만 72세로 올림픽 최고령 출전 기록과 메달 획득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64세 258일의 나이로 최고령 금메달 기록도 가지고 있다.
크로켓(Croquet)
크로켓은 나무망치(맬릿)로 공을 쳐서 문(후프)을 통과시키는 구기종목으로 프랑스에서 유래되었다. 공원에서 볼 수 있는 게이트볼과 비슷한데 이는 1947년 일본의 스즈키 가즈노부가 크로켓을 보고 발전시킨 것이다.
▲ 1900년 파리올림픽 크로켓 경기
1900년의 파리 올림픽 크로켓 토너먼트는 불로뉴 숲에서 열렸는데 여성이 첫 출전한 경기로 역사에 남아있다. 당시 3명의 프랑스 여성이 참가했으나 1회전에서 탈락했으며, 참가했던 12명의 선수 모두가 프랑스 파리 출신이었다.
크리켓(Cricket)
영연방 국가들에게는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 종목이지만 다른 대륙에서 인기가 별로 없었던 관계로 올림픽에서는 1900년 단 한차례만 열렸다.(1896년은 참가팀 부족으로 취소)
1900년 올림픽에는 프랑스 대 벨기에, 프랑스 대 네덜란드, 프랑스 대 영국의 세경기가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선수부족으로 기권하고 벨기에도 팀을 보내지 않으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경기만 열렸다. 양 팀 다 국가대표도 아닌 클럽팀과 프랑스 현지에서 일하는 영국인들로 급조된 팀이었기에 선수들조차 경기가 파리박람회 행사인지 올림픽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 크리켓 경기가 열린 벨로드롬 드 뱅센(Vélodrome de Vincennes)
크리켓 역사상 유일한 올림픽 경기는 프랑스에서는 생소하고 어려운 종목이었기에 극소수의 관중만이 입장하였다. 다음 대회인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서는 참가인원과 시설이 부족해 취소되었고, 이후 올림픽에서 크리켓은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고 있다.
로케(Roque)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서 단 한차례 열린 종목.
▲ 1904년, 올림픽 로케 경기장 모습
전대회에서 열린 크로켓의 미국판으로 사실 자국의 금메달 개수를 늘리기 위해 포함시킨 경기들 중 하나였다. 참가자 4명 모두 개최국인 미국 선수들이었다.
라켓(Rackets)
1908년 런던올림픽에서는 라켓 남자단식, 복식 두 종목이 시행되었다.
▲ 1902년, 라켓 선수들
라켓은 영국·미국·캐나다에서 주로 하는 실내 스포츠로 스쿼시와 유사한 종목. 이 대회에서 금·은·동은 영국 선수들이 독식했다.
라크로스(Lacrosse)
1904·1908년에는 정식종목이었다가 사라진 후 1928·1932·1948년에는 시범종목으로 열리며 정식종목으로 귀환을 노렸으나 영영 사라졌다.
▲ 1948년 런던올림픽 라크로스
야구와 같은 인기 스포츠도 정식종목 유지가 힘든 상황에서 라크로스와 같은 전통은 있다 해도 대중들에게 생소한 게임이 다시 정식종목이 되는 것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
주 드 폼(Jeu de paume)
1900년 파리올림픽 비공식 종목으로 처음 채택된 주드폼은 1908년 런던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등장했다.
라켓을 가지고 하는 현재의 테니스와 비슷한 경기로 실내에서 열리며 당시에는 영문으로 ‘Tennis’로 표기되었다. 1908년 런던올림픽 보고서에서도 주드폼(Jeu de paume)을 ‘테니스’라고 하고, 테니스는 ‘잔디 테니스(lawn tennis)’로 명명해 두 종목을 구분했다.
▲ 17세기의 주드팜 경기 | 프랑스 국립도서관
종목 이름의 뜻이 ‘손바닥 게임’으로 초기에는 실내에서 라켓 없이 하는 테니스와 배구를 섞은 것과 같은 경기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장갑을 끼고 최종적으로는 라켓이 도입되었다. 그럼에도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며 올림픽 정식종목까지 되었다.(일부 자료에 손바닥으로 하는 게임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이는 초창기의 모습을 유지한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 현대 주드팜 코트와 장비
하지만 잔디 테니스(lawn tennis)의 인기가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주드폼은 올림픽에서 사라짐에 따라 오늘날 ‘테니스’라는 이름은 잔디 테니스(lawn tennis)가 차지하게 되었다.
폴로(Polo)
의류상표로 익숙한 게임으로 1900년 파리올림픽에 처음 등장하였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까지 네 개 대회에서 열렸으나 2차 대전을 계기로 인기가 떨어지면서 퇴출되었다.
▲ 1924년 올림픽 금메달 아르헨티나 팀
1900년 올림픽의 폴로 경기는 파리의 바가텔 폴로클럽(Bagatelle Polo Club)에서 개최되었으며 참가자를 레벨에 따라 그룹화하였다. 다섯개 팀이 올림픽 토너먼트에 참가하여 폭스헌터스 헐링엄(Foxhunters Hurlingham)팀이 우승했다.
2018년 유스올림픽에서 시범종목으로 선정되며 성인대회는 아니지만 오랜만에 올림픽에 등장했다.
필드 핸드볼(Field handball)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야외에서 하는 필드 핸드볼이 정식종목으로 열렸다. 11명의 선수가 축구장과 비슷한 크기의 운동장에서 30분간의 전후반으로 대결을 펼쳤다.
▲ 1936년, 올림픽 필드 핸드볼 경기
이후 실내 핸드볼이 점차 인기를 얻으면서 체력소모가 심하고 재정도 많이 소요되는 필드 핸드볼은 점차 자리를 잃었고, IHF 필드핸드볼 대회(IHF World Men’s Outdoor Handball Championship)도 1966년을 끝으로 사라졌다.
마상체조(Equestrian Vaulting)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에서 마상체조가 승마의 프로그램으로 한차례 열렸다. 참가 선수는 정해진 동작을 말 위에서 수행하는 서커스 같은 부문이었다.
▲ 마상체조
남자 잠영(Men’s underwater swimming)
1900년 파리올림픽 남자 수영 7개 세부종목 중 하나로 경기규칙은 잠수시간 1초당 1점, 2m 이동시 2점을 획득하는 점수제였는데 프랑스의 샤를 드벤드빌(Charles Devendeville)이 68.4초간 잠영하면서 60m를 전진해 총점 188.4점으로 우승하였다.
▲ 1900년 파리올림픽 수영 경기장
사실 덴마크의 페데르 뤼케베르(Peder Lykkeberg)가 무려 90초간 잠영하며 더 우수한 실력을 보였으나, 문제는 그가 직진하지 않고 옆으로 수영을 해버렸다. 결국 출발점에서 잰 직선거리가 고작 28.5m에 그치면서 147점으로 3위에 그쳤다.
수면 아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관객들은 알 수 없는 종목이었기에 별로 호응이 없었고 이후 올림픽에서 제외되었다.
장애물 수영(Men’s 200 metre obstacle event)
이 종목 역시 파리 올림픽 수영의 세부종목으로 딱 한번 열렸다. 5개국 12인의 선수들은 200m구간에 설치된 장애물 기둥을 넘고 보트에 오른 다음 마지막으로 보트 밑으로 통과하면서 결승선까지 도달해야 했다.
▲ 장애물 수영 금메달 리스트 프레드릭 레인
8월 12일에 열린 결승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선수는 호주의 프레데릭 레인(Frederick Lane, 1880~1969). 그는 1969년 국제수영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다.
다이빙 멀리뛰기(Plunge for distance)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다이빙의 세부종목이다.
5명의 미국 선수들이 경쟁하였는데 선수들은 다이빙으로 입수한 다음, 손발을 쓰지 않고 다이빙할 때의 힘으로만 둥둥 떠서 앞으로 가다가 60초 후, 혹은 수면 밖으로 머리가 나오는 순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여 순위를 정했다.
▲ 1918년, 다이빙 멀리뛰기 경기모습
미국의 윌리엄 딕키(William Dickey)가 19.05m로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을 차지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크게 활성화되었던 다이빙 멀리뛰기는 1920년대에 들어서며 ‘이렇게 가만히 있는게 운동이냐’라는 여론과 함께 인기가 시들해졌다.
로프 등반(Men’s rope climbing)
줄타기 혹은 로프 등반은 1896년 아테네 올림픽 체조의 세부종목으로 등장했다. 14m의 높이까지 로프를 타고 올라가는 시간을 측정하고 체조경기인만큼 누가 더 우아하게 올라가는지 스타일 점수도 매겨졌다.
첫 대회에 참가한 다섯 명의 선수 중 단 두 명의 그리스 선수만이 14m의 정상을 올라갔는데 이는 로프가 매듭이 없고 미끄러운 재질이었기 때문이었다.
▲ 1896년, 로프 등반 경기
두 번째로 등장한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서는 스타일 점수 없이 속도로만 경쟁했는데 7.62m의 로프를 7초 만에 올라간 조지 아이저(George Eyser, 1870~1919)가 우승을 차지했다.
독일계 미국인이었던 조지 아이저는 어린 시절 기차에 치어 왼쪽 다리를 절단당했는데도 이 대회에서 메달 6개를 획득했다(금3, 은2, 동1). 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왼쪽다리를 교통사고로 잃은 남아공 수영선수 나탈리 뒤 투아(Natalie Du Toit)가 등장할 때까지는 의족을 착용하고 올림픽에 참가한 유일한 선수로 기록되어 있었다.
▲ 1908년, 조지 아이저의 모습(가운데)
1924년 파리올림픽에 20년 만에 재등장한 로프 등반은 9초 이하로 올라가면 10점 만점, 0.2초 초과시마다 1점이 감점되었고 12초가 초과하면 0점 처리되었다. 총 18명의 선수가 9초 안에 올라가며 10점을 받았는데, 체코슬로바키아의 베드르지흐 수프치크(Bedřich Šupčík)가 그중 제일 빠른 7.2초를 기록하며 금메달을 차지했다.
1932년 LA올림픽은 로프 등반이 마지막으로 선보인 대회였다. 로프 높이는 8m로 미국 선수들이 금·은·동을 차지했다. 체조 세부종목으로 분류되면서도 로프 등반은 개인종합이나 팀 종합점수에서 제외되며 별개의 취급을 당하는 등 퇴출이 예고되고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이미 체조에서 제외된 로프 등반이었지만 미국이 개최국의 메달을 늘리고자 포함한 것으로 참가국도 미국과 헝가리뿐이었다. 헝가리 선수들은 1차 시기에서 미국 선수들의 기록과 현격히 차이가 나자 나머지 시기를 포기했다.
제자리 높이뛰기(standing high jump), 제자리 멀리뛰기(standing long jump), 제자리 삼단뛰기(standing triple jump)
육상의 세부종목으로 1900년 파리올림픽부터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까지 열렸으며 도움닫기 없이 점프하는 종목이었다.(제자리 삼단뛰기는 1900년, 1904년에만 시행)
※ 제자리 삼단뛰기는 두발로 서서 점프한 다음 한 발로 착지, 다시 점프해서 반대쪽 발로 착지, 그리고 마지막 점프에는 두발로 착지했다.
첫 대회의 결과는, 세 종목 모두 미국의 레이 유리(Ray Ewry, 1873~1937)가 차지했다. 그는 다음 대회에서도 3관왕을 차지하는 등 올림픽에서만 총 8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당대 최고의 제자리 뛰기 선수로 군림했다.
▲ 레이 유리의 경기모습
레이 유리는 올림픽 제자리 뛰기에서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 제자리 높이뛰기 1.655m (1900년)
– 제자리 멀리뛰기 3.47m (1904년)
– 제자리 삼단뛰기 10.58m (1900년)
올림픽에서 사라진 종목이기 때문에 다시 부활하지 않는 한 레이 유리의 올림픽기록은 불멸의 기록이다.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Synchronized swimming) 솔로
1984년부터 1992년까지 3번의 올림픽에서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은 솔로와 듀엣 부문이 있었다. 솔로 경기는 ‘일체화(Synchronized)‘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과 함께 주관적인 심사에 불만이 일어났다.
▲ 1984년,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솔로 금메달 트레이시 루이즈(Tracie Ruiz)
결국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단체부문만 시행되었고 이후 듀엣과 팀 부문이 열리고 있다. 2020년 도쿄올림픽부터는 종목 명칭도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에서 ‘아티스틱 스위밍(Artistic swimming)’으로 바뀌었다.
2. 시범종목으로 등장했던 종목들
미식축구(American football)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 비공식 종목으로, 1932년 LA올림픽에 시범종목으로 등장한 미식축구는 인기 있는 지역이 극히 제한적인 종목이라 이후 올림픽에 재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식축구 선수들은 높은 신체능력을 가진 터라 다른 종목을 통해 올림픽에 도전했다.
▲ 1904년, 금메달을 획득한 캐나다 대표 Galt F.C.
캔턴 불독스의 짐 소프(Jim Thorpe, 1887~1953)가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육상 5종 경기와 10종 경기에 출전해 금메달 2개를 획득하기도 했으며, 디트로이트 라이온즈의 글렌 데이비스(Glenn Davis, 1934~2009)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 400m허들에서 금, 1960년 로마 올림픽 400m허들과 400m계주에서 금 등 총 3개의 금메달로 미식축구 출신선수 중 최다 금메달을 획득했다.
오스트레일리안 풋볼(Australian football)
‘오지 풋볼(Aussie Football)’이라고도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안 풋볼은 1956년 멜버른 올림픽의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호주 올림픽위원회(AOC)는 시범종목으로 선정할 국기 스포츠(National Sport)에 인명구조와 부메랑 등을 고려하다가 결국 오지 풋볼을 선택했다. 비슷해 보이는 미식축구와 가장 쉽게 구분되는 것은 타원형 경기장에서 대결을 펼친다는 것.
▲ 오지 풋볼 경기장 형태
호주에 국한된 제한적인 인기 탓에 자국 올림픽에 시범종목으로 선보인 이후 다시는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올림픽을 계기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오늘날 호주에서 가장 많은 관중수와 TV 시청률을 자랑하는 스포츠가 되었다.
라 깐느(La canne)
깐느는 프랑스 무술인 깐느 드 꽁바(Canne de Combat)의 한 갈래로 1924년 파리올림픽에서 시범종목으로 선보였다. 깐느(Canne)라 불리는 스틱을 들고 허용되는 신체부위를 가격하는 격투기이다.
▲ 깐느 드 꽁바
1970년대에 들어서 단순한 무술을 넘어 스포츠 경기를 위해 표준화되었으며, 펜싱 스타일의 마스크와 패딩 처리된 보호장구를 착용한다.
글리마(Glima)
북유럽 민속씨름의 한 계열인 글리마는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의 시범종목으로 한차례 등장했다.
▲ 글리마 경기모습과 글리마 벨트
원래는 바지춤을 잡고 상대를 넘어뜨리는 방식이었으나 한국씨름의 샅바처럼 ‘글리마 벨트’라는 것을 차고 그것을 잡게 변형되었다. 특이한 점은 한국씨름은 손을 짚으면 패배하지만 글리마는 손을 짚어서 넘어지지 않으면 패배가 되지 않는다.
사바트(Savate)
킥복싱과 유사한 프랑스 격투기로 1924년 파리올림픽 시범종목에 있었으며, 프랑스의 무술계열로 묶여서 위에 나온 ‘라 깐느’와 시범경기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하였다.
▲ 사바트 경기모습과 전용 신발
킥복싱과의 차이점은 무릎이나 정강이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는 점이며 사바트 전용 신발을 신는다.
무도(武道)
일본의 근대 무예들을 모아놓은 종목으로 1964년 도쿄올림픽의 시범종목으로 등장하였다. 궁도, 검도, 스모 등이 선을 보였으며 유도는 무도에 속하긴 하지만 별개의 정식종목이 되었다.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가라테(공수도)까지 정식종목이 되면서 현재 올림픽에서는 무도의 세부종목 2개가 정식종목이 된 셈이다.
롤러하키(Roller hockey)
링크 하키(미국식)로도 알려진 롤러하키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열렸으며, 카탈루냐(Catalunya) 지방에서는 폭넓은 인기를 자랑하는 스포츠였다.
12개국이 참가한 올림픽 당시, 개최국 스페인을 누르고 아르헨티나가 우승을 차지했으며 여자경기는 열리지 않았다.
▲ 바르셀로나 올림픽 롤러하키 결승전
비슷한 종목으로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신고하는 인라인 하키가 있는데, 두 종목의 차이점은 신발뿐만 아니라 롤러하키에서는 선수간 과도한 접촉이 금지된다는 점이다. 외관에서 롤러하키는 필드하키와 비슷하고 인라인하키는 아이스하키와 흡사하다.
10핀 볼링(Tenpin Bowling)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시범종목으로 등장한 10핀 볼링은 총 20개국의 선수들이 참가하였으며 모두 아마추어 선수들로 제한되었다. 남자부문에서는 한국의 권종율이 우승했다.
이후 꾸준한 로비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데, 볼링의 올림픽 종목에 부정적인 요인은 저개발 국가의 청소년들이 배우고 접근하기에는 대중성도 낮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이다.
▲ 서울올림픽 볼링 권종율 경기모습
현재 팬아메리칸 게임에서는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있고 생활체육으로 사랑받고 있어서 올림픽에 복귀할 가장 높은 확률의 종목이라고 할 수 있다.
코프볼(Korfball)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두 차례 시범종목으로 등장했다. 네덜란드에서 고안된 스포츠로 농구와 유사한데, 남자 4명 여자 4명 총 8명의 혼성으로 경기를 펼친다는 점이 독특한 부분.
▲ 1928년 올림픽 코프볼 경기
국가대표 경기인 월드게임이 1985년부터 4년마다 열리고 있으며(2021년 대회는 2022년으로 연기), 1회 대회부터 지금까지 종주국 네덜란드가 우승을 독식하고 있다. 준우승은 2인자 벨기에가 계속 차지하고 있었는데 지난 2017년 대회에서 사상 최초로 대만이 준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또 국제코프볼연맹이 주관하는 국가대표경기인 IKF 월드코프볼 챔피언십에서도 네덜란드-벨기에-대만 순으로 세 나라가 순위를 독식하고 있다.
페새팔로(Pesäpallo)
야구가 핀란드에서 변형된 종목으로 1954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시범경기로 열렸다.
▲ 페새팔로 경기
당시에는 핀란드의 국기 스포츠라는 이유로 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선정되었고,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핀란드 야구연맹과 핀란드 노동자 스포츠연맹 두 팀의 경기만 열렸고 핀란드 야구연맹이 우승을 차지했다.
글라이딩(Gliding)
글라이딩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시범종목이었다.
무동력 항공기(글라이더)로 공기의 흐름을 타고 활공하는 스포츠로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짧은기간 독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937년에는 글라이더 조종사만 5만여 명에 달했으며, 1940년 도쿄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기까지 하였으나 전쟁으로 올림픽이 취소되었다.
▲ 1936년 올림픽 글라이딩 홍보책자
전후에는 글라이딩 선수의 부족과 글라이더 기체의 국제표준화에 대한 합의실패로 인해 현대 올림픽에는 복귀하지 못하고 있는데, 회원수가 계속 늘고 있고 세계 글라이딩 선수권대회가 2년마다 꾸준히 열리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 ‘하늘의 요트경기’로 올림픽 복귀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수상스키(Water skiing)
1972년 뮌헨올림픽의 시범종목으로 20개국에서 35명의 참가자들이 경쟁했다. 인기 있는 현대 레저문화지만 기계의 동력을 이용한다는 점 때문인지 올림픽 정신의 벽을 넘지 못하며 72년이 처음이자 마지막 대회로 남았다.
스웨덴 ‘링’ 체조(Swedish ‘Ling’ gymnastics)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스웨덴 ‘링’ 체조 시범이 있었다. 이 체조는 스웨덴 체조의 아버지 페르 헨리크 링(Pehr Henrik Ling, 1776~1839)에 의해 개발된 운동법으로 맨몸으로 하는 체조였다.
▲ 1948년 ‘링’ 체조 시범
당시 시연에는 400명의 스웨덴 체조선수들(여자 200명, 남자 200명)이 동원되었는데, 홍보에 사활을 걸고 자비를 들여 런던까지 와서 8월 7일 축구 결승전과 8월 13일 마라톤 경기전에 시범을 보였다. 이들은 올림픽 경기장을 출입하기 위해 선수 신분증을 발급받았기에 과거의 시범종목 중 하나로 소개되고 있다.
3. 비공식 종목과 황당한 종목
권총 결투(duelling pistol)
권총 결투는 근대 올림픽 10주년을 기념해서 아테네에서 열린 1906년 중간 올림픽(1906 Intercalated Games)의 정식종목이었다. 칼리테아 사격장에서 열린 20m·30m 두 부문에서 선수들은 석고로 만든 157cm의 사람 형상을 향해 총을 쏘았다.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메달이 전혀 걸려있지 않은 이벤트성 종목으로 선보였는데, 그 이유는 1906년과는 달리 실제 사람이 마주 보고 사격을 했기 때문이었다.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왁스총알(밀랍탄)’이 화약 없이 장전되었고 거기에 더해 선수들은 보호장구로 온몸을 감쌌다.
▲ 1908년 권총 결투 경기
‘일대일 결투’라는 로망을 포기 못한 귀족들이 계속해서 종목추가 시도를 한 모양이지만, 두꺼운 보호장구를 입고 벌이는 스포츠가 그다지 멋져 보이거나 박진감 있었을 리가 만무했고 무엇보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사라졌다.
게일릭 풋볼(Gaelic football)
아일랜드식 축구인 게일릭 풋볼은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서 비공식 종목으로 선보였다. 아일랜드에서는 널리 인기를 구가하는 국기 스포츠로 4가지 게일릭 게임(게일릭 풋볼, 헐링, 게일릭 핸드볼, 라운더스)에 속한다.
게일릭 풋볼은 축구처럼 옐로카드와 레드카드가 있지만 차이점은 블랙카드가 있다. 이 카드를 한번 받으면 10분간 퇴장당하며 옐로카드처럼 2회 누적되면 레드카드를 받고 완전히 퇴장당한다.
▲ 게일릭 풋볼의 블랙카드
특이한 점은 선수나 코치, 심지어 감독에게도 급여지급이 금지되는 등 엄격한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하는데 이런 부분은 근대 올림픽 정신에 가장 부합하는 종목이다.
낚시(Angling)
낚시 대회는 센강에 있는 인공 섬인 시뉴섬(Île aux Cygnes)에서 열렸는데, 4일간 600명의 낚시꾼들과 2만여 명의 관중이 몰려 인기있는 레저임을 증명했다.
당시 센강은 하수 오염으로 인해 수질이 그다지 좋지 못했는데도 참가자들은 결승에서 881마리를 포함해 대회 기간 동안 2,051마리의 물고기를 낚았다.
▲ 1900년 올림픽 낚시대회
시상은 두 가지 부문으로 프랑스 아미앵 출신의 엘리 르쉬외르(Élie Lesueur)가 ‘가장 큰 물고기’ 부문을, 히아생트 랄란느(Hyacinthe Lalanne)가 ‘가장 많은 물고기(47마리)’ 부문을 수상했다.
당시 함께 열린 파리박람회를 홍보하고 관객을 끌기 위한 쇼로 전락한 올림픽은 이처럼 온갖 잡다한 종목까지 진행했다. 일부 자료들을 보면 ‘푸들 털 미용’등의 대회도 열렸다고 하는데 당연히 현재 IOC의 공식 데이터에는 없고 인정하지도 않는 이벤트성 대회였다.
열기구(Hot air ballooning)
열기구 대회는 1900년 파리 올림픽과 함께 열린 박람회의 ‘경항공술(Aerostation)’ 행사로 열렸다. 올림픽인지 박람회 행사인지 애매하지만 어쨌든 올림픽의 비공식 종목으로 구분하고 있다.
경쟁부문은 비행시간, 최장거리, 최대고도, 최단거리(정해진 지점에 가깝게 착륙하기)였으며 모두 프랑스 국적인 46명의 조종사가 48개의 열기구로 156회의 열기구 비행을 수행했다.
▲ 1900년 파리 올림픽 열기구 경기
1900년 6월 17일부터 조종사의 조수까지 총 326명의 인원이 대회에 참가하였으며, 열기구마다 부피가 달랐기 때문에 모래주머니를 달아서 동일한 양력 조건에서 경기가 진행되었다.
– 고도 부문: 자크 발상(Jacques Balsan) 8,417m
– 비행시간: 자크 발상(Jacques Balsan) 35시간
– 최장거리: 앙리 드 라보(Henry de La Vaulx) 1,237km
– 최단거리: 앙리 드 라 발렛(Henri de la Valette) 800m
최고의 열기구 조종사 14명의 결승전은 10월 9일에 열렸다. 앙리 드 라보(Henry de La Vaulx)는 파리를 출발해 우크라이나의 코로스티시프(Korostyshiv) 부근에 착륙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최장거리(1,925km)와 비행시간(35시간 45분)의 세계기록도 경신했다.
불(Boules)
금속으로 만든 공을 작은 공에 최대한 가깝게 굴리는 스포츠. 1900년 파리 올림픽의 비공식 종목으로 생망데(Saint-Mandé)의 불 경기장에서 열렸다.
▲ 불(Boules) 경기 모습
당시에는 프랑스에서 매우 인기있는 스포츠였으며, 참가자 모두 리옹과 파리에서 온 불팀이었다. 54개 팀 216명이 참가하였으며 우승팀에게는 상금과 1,500프랑을 넘지않는 예술작품이 부상으로 주어졌다.
대포 사격(Canon Shooting)
대포 사격은 파리 대포사격협회(Société de tir au cannon de Paris)와 뱅센(Vincennes) 포병의 협력하에 시행된 비공식 종목이다. 사실 운동종목이라기보다는 포격시범에 가까운 행사로 열렸으며 개별사격, 야전사격, 공성포 사격의 3개 부문이 시행되었다.
▲ 1900 파리올림픽 개별사격 모습
개별사격은 90mm 야포를 60m 밖의 타깃에 명중시키는 것으로 6일간 열린 경기 기간 동안 542명의 인원이 참가하였다.
야전사격은 16명의 장교와 30명의 부관들이 6문의 포로 참여했고, 공성포 사격은 1명의 지휘관 아래 12명의 사수와 8명의 부관 등 많은 인원이 필요한 대회였다.
일각에는 ‘민가를 부수고 폐지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주장을 하지만 실제로 관련기록을 제시하는 경우는 없다. 앞에 나왔듯이 개별사격은 60m 밖의 타깃을 쏘는 직사 개념이었으며, 나머지 부문도 군대의 협조 아래 일반인이나 병사가 아닌 장교와 부사관들의 시범이었기에 그런 사건이 발생했을 확률은 낮다.
사실 전쟁을 중단하자는 취지를 가진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에 개인 방어무기도 아닌 대포가 등장하는 것은 확실히 모순이었고, 애당초 일회성 시범이었기에 폐지되었다는 말 자체가 어폐다.
연날리기(Kite Flying)
1900년 파리올림픽의 비공식 종목으로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강풍으로 인해 많은 연들이 끊어져 나무에 걸렸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로 진행이 어려운 경기였다.
주어진 1시간 동안 가장 높이 날리는 부문과, 200m 높이에서 2시간 동안 버티는 부문이 있었으며 중형·소형·대형으로 체급도 나누어져 있었다. 1900년 8월 19일에 열린 소형 부문에는 대부분 아이들이 참가했으며 강풍이 그치지 않아 중형과 대형부문은 한 달 이상 지난 9월 말이 되어서야 진행되었다.
인명구조대회(Life saving)
①. 소방대회
인명구조대회는 크게 세 가지 부문을 놓고 벌어졌다.(소방대회, 수상인명구조, 응급처치)
먼저 소방대회는 5개국의 소방관들이 1900년 8월 13일부터 19일까지 뱅센 숲(Bois de Vincennes)에 모여 소방펌프 기동대회를 열었다.
▲ 1900년 올림픽 소방대회 참가팀
참가팀들은 화재를 진압하고 인명을 구조하는 미션을 달성해야 했으며 주어지는 미션은 “6층 건물의 3층에서 화재 발생. 2층 계단 통행은 불가, 3층에 있는 인명 구조할 것”이라는 식으로 주어졌다.
전문소방관들과 의용소방대로 이루어진 아마추어 부문이 따로 수상되었는데 아마추어 부문은 포르투갈 대표로 나온 포르투 소방팀이 영국 런던과 헝가리 부다페스트 팀을 제치고 우승했고, 전문소방관 부문은 미국 대표로 출전한 캔자스시티 소방대가 이탈리아 밀란 소방대를 제치고 우승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자국의 우승소식을 대서특필해 올림픽이 아닌 국제소방대회로 착각될 정도였다고 한다.
②. 수상 인명구조
수상 인명구조는 1900년 7월 22일부터 7월 24일까지 꾸흐브부와(Courbevoie)와 아스니에흐(Asnières)사이의 센강에서 열렸으며 1,000명의 참가자가 아래와 같은 부문 등에서 경쟁하였다.
– 300m를 헤엄쳐 조난자로 설정된 마네킹을 잡고 50m를 끌고 가는 부문
– 평상복을 착용한 상태에서 200m를 헤엄치는 부문
– ‘침몰하는 30톤의 어선’으로 설정된 배에 있는 자원봉사자와 마네킹을 구하는 임무
일부 자료에서는 ‘조난자로 설정된 사람이 실제 물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참가자들 중 누구도 이 사람을 구해내지 못해 익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종목폐지의 원인으로 적어놓은 경우도 있지만 파리올림픽 보고서나 당시 신문 등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황당함을 배가시키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이다.
스포츠보다는 직업에 가깝다는 점이 폐지의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스포츠로 경쟁할 국제표준도 갖추지 못했다.
③. 응급처치
인명구조 3가지 부문 중 가장 인기 있었던 대회로 사이클 경기장인 벨로드롬 드 뱅센(Vélodrome de Vincennes)에서는 3천여 명이 참가한 응급처치 대회가 열렸다.
▲ 벨로드롬 드 뱅센
각자 소속된 구조단체의 명예를 걸고 참가한 이들은 실제 전쟁터로 설정된 이곳에서 군인과 민간인 부상자들을 지혈이나 심폐소생술 등 응급처치를 한 뒤 들것에 싣고 흔들림 없이 장애물 코스를 통과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모터스포츠(Motorsport)
1900년 파리올림픽 비공식 종목으로 동력을 이용하는 자동차 경주, 오토바이 경주, 모터보트 경주가 박람회와 연관되어 열렸다.
▲ 자동차 경주 모습
자동차 경주 부문에는 차체의 크기와 거리별로 종목이 세분화되었으며 제조업체명을 앞세워 등록했기 때문에 기록에 회사명은 남아있어도 드라이버의 이름은 대부분 ‘무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 프랑스 국적이었으며 우승자들은 메달이 아닌 예술작품들을 상으로 받았다. 또 1마일을 달리는 오토바이 경주도 비공식 종목으로 열렸는데 미국 선수들이 모두 우승했다.
모터보트 경주는 1900년 6월 23일에서 24일 양일간 열렸으며, 센강의 아흐정뙤이(Argenteuil) 유역 6km 구간에서 열렸다. 49명의 선수가 참가했으며 보트는 길이에 따라 4가지로 분류되었다.
수상 모터스포츠(Water motorsports)
1900년 파리올림픽에서 비공식 종목으로 시행되었다가 사라진 모터보트 대회가 1908년 런던올림픽에서는 정식종목으로 시행되었다.
1908년 8월 28일~29일 양일에 걸쳐 열린 대회는 총 74km를 주행하는 3가지 부문이 벌어졌는데, 2개국(프랑스, 영국) 17개 팀 중 결승선에 들어온 팀은 부문당 한 팀씩에 불과했다.
▲ 모터보트 경기
이유는 개최지인 갯벌 하구 사우샘프턴 워터(Southampton Water)의 악천후 때문이었고, 보는 관객도 없고 이처럼 경기결과도 엉망이어서 단명하고 말았다. IOC는 올림픽은 인간의 신체능력 경쟁을 위한 것이지 기계의 동력 경쟁이 아니라는 명분으로 폐지했다.
살아있는 비둘기 사격(Live pigeon shooting)
1900년 파리 올림픽에 등장한 종목으로 실제 살아있는 비둘기를 선수의 27m 앞에서 한 마리씩 날려 보내고 사격으로 맞추는 방식이었다. 라운드당 6마리를 차례차례 날리는데 첫 두 마리를 놓치면 무조건 탈락이었다.
올림픽 기간 중 두 개의 대회가 열렸으며, 1900년 6월 19일에 열린 대회에는 ‘그랑프리 뒤 센테나레(Grand Prix du Centenaire)‘, 6월 25~27일까지 열린 대회는 ‘1900년 세계박람회 대상(Grand Prix de l’Exposition universelle de)‘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 대회 참가자들
대회 결과:
1900년 세계박람회 대상
1위 – 레온 드 룬덴(Leon de Lunden, 벨기에) 21마리
2위 – 모리스 푸레(Maurice Faure, 프랑스) 20마리
3위 – 도널드 매킨토시(Donald MacIntosh, 호주) 18마리
4위 – 크리텐던 로빈슨(Crittenden Robinson, 미국) 18마리
그랑프리 뒤 센테나레
1위 – 도널드 매킨토시(Donald MacIntosh, 호주) 22마리
2위 – 페드로 피달(Pedro Pidal, 스페인) 21마리
3위 – 머피(Murphy, 미국) 19마리
대회 기간 중 총 300여 마리의 비둘기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이는 올림픽에서 유일하게 고의적으로 동물을 살해한 종목(관점에 따라서는 낚시도 포함될 수 있다)이었기에 비록 120년 전이지만 동물학대 논쟁에 휩싸였다. 이후 1902년 미국에서는 살아있는 비둘기를 쓰는 것이 금지되어 점토(clay)로 만든 접시가 도입되었고 오늘날에도 이 접시를 ‘피죤(pigeon)‘이라 부른다.
파리올림픽 공식 보고서에는 ‘매우 귀족적인’ 스포츠로 소개되어있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논란이 있는 혐오종목이라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열렸음에도 정식경기로 인정하지 않는다.
비둘기 경주(Pigeon racing)
비둘기 경주는 1900년 파리올림픽 비공식 종목으로 추가되었으며 박람회의 이벤트도 겸하여 진행되었다. ‘경주’라고 해서 100m, 1000m 경주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비둘기의 ‘귀소본능’을 이용하는 것.
※ 비둘기는 자기장과 후각, 뛰어난 시각인지능력으로 방향감각과 귀소본능이 탁월해 예로부터 ‘전서구(傳書鳩)’로 불리며 수천 년 전부터 전장에서 통신병 역할을 할 정도였다.
비둘기를 이용한 우편서비스는 무려 2008년까지 시행되었으며, 어두운 부분이지만 남미의 감옥에서는 경주용 비둘기를 이용해 불법 반입물과 마약까지 운반하는 뉴스가 최근까지 보도되었다.(관련뉴스)
일부 매체에서는 ‘비둘기들이 자기들 멋대로 날아가는 통에 대회진행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위에 설명한 비둘기의 귀소본능과 전서구의 역사를 알고 있다면 이는 경주용 비둘기를 야생 비둘기와 구분하지 못한 착각이거나 고의로 희화화시킨 각색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게다가 비둘기 경주는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벨기에에서 시작되었기에 1900년 즈음이면 체계적으로 발전해있을 시기였다. 현재도 비둘기 경주는 세계 각지에서 열리고 있으며 대만과 중국에서는 매우 인기있는 스포츠로, 지난 2020년 우수한 경력의 경주용 비둘기가 160만 유로(한화 약 21억 7천만 원)에 팔리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관련뉴스)
▲ 영국 왕립 비둘기경주협회(Royal Pigeon Racing Association, RPRA)로고. 영국 국왕이 회장이다.
한편, 1900년 올림픽의 비둘기 경주는 파리에서 80km 이상 떨어진 둥지를 갖고 있는 조련사의 경우 참여가 가능했는데, 날이 저물기 전에 비둘기가 둥지로 돌아올 수 있게 대회는 아침 일찍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박람회의 인파는 낮에 가장 많았기 때문에 오전에는 올림픽 경주를 위해 비둘기를 날리고, 오후에는 박람회 관객들을 위해 비둘기를 날려보내는 등 두 가지 행사가 치러졌다.
▲ 특수 개조된 비둘기 경주용 트럭에서 비둘기들이 날아가고 있다.
올림픽을 위해 전국 각지의 비둘기 경주 애호단체들이 파리에 모였으며 7,721마리의 비둘기들이 경주에 참여해 파리에서 리옹에 있는 둥지까지 4시간 30분 만에 귀환한 비둘기가 우승한 것으로 전해진다.
▲ 비둘기 링과 과거의 피죤 클락 | 작동방식
비둘기 경주는 ‘출발점은 1개, 결승점은 1,000개인 스포츠’라 칭해지듯이 둥지의 위치가 주인에 따라 각각 다르기 때문에 비행거리와 소요시간을 측정해 가장 빠른 평균속도를 보인 비둘기가 우승하는 방식이었다.
올림픽 당시에는 고유식별번호가 새겨진 링을 비둘기의 다리에 부착하고 둥지에서 기다리던 주인이 링을 제거해 ‘피죤 클락(pigeon clock)’이라 불리는 시계에 넣는 것으로 시간을 측정했다.
▲ 최근에는 GPS 비둘기 경주용 링도 출시되고 있다.
또 박람회 행사를 위해 오후에 날려보낸 비둘기는 11,787마리로 비둘기 주인들은 날려보낸 비둘기 마릿수에 따라 보상을 받았다.
헐링(Hurling)
헐링은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의 비공식 종목으로 게일릭 풋볼과 함께 아일랜드의 4대 국기 스포츠에 들어가는 스포츠이다.
▲ 헐링(Hurling)
막대기로 작은 공을 치는 구기종목으로 라크로스나 하키와 흡사하다. 올림픽 당시에는 시카고와 세인트루이스 선발팀 간의 친선경기가 열렸다.
사이클 폴로(Cycle Polo)
1891년 아일랜드 사람인 리처드 맥크레디(Richard J. McCready)에 의해 고안된 게임으로, 1901년 첫 국제경기를 가진 후 불과 7년 만인 1908년 런던올림픽 비공식 종목으로 등장할 정도로 빠른 발전을 이루었으나 말 대신 자전거가 사용되는 것을 제외하면 전통적인 폴로와 똑같아서 그런지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하고 올림픽에서 사라졌다.
▲ 1908년 사이클 폴로
당시 런던에서는 아일랜드 사이클폴로협회와 독일클럽 선수들 간의 경기가 열렸는데 아일랜드가 3:1로 승리했다.
롱그 폼(Longue Paume)
1900년 파리올림픽의 시범종목으로 진행되었으며, 1908년 정식종목이었던 주드폼의 갈래 스포츠로 야외에서 하는 차이점이 있다. 그런 이유로 현대 테니스의 직계 조상으로 간주된다.
대회는 파리 뤽상부르 공원(Le Jardin du Luxembourg) 내의 롱그폼 경기장에서 열렸다.
카트센(Kaatsen)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의 비공식 종목으로 네덜란드가 기원인 핸드볼 종목이었다.
▲ 카트센(Kaatsen)
팀당 3명의 선수가 맨손으로 공을 치면서 테니스와 유사한 게임 진행을 펼친다. 카트센(Kaatsen)의 시연은 1928년 7월 11일 크리켓 올림픽 경기장에서 열렸다.
올림픽 예술대회(Art competitions)
올림픽이 5회째를 앞두고 권위가 쌓여가면서 1909년 베를린에서 열린 IOC 회의에서 스웨덴 대표단은 서커스(?)가 아닌 순수 스포츠(육상, 수영, 체조, 레슬링 등)라 할 수 있는 종목만을 치를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다른 국가들이 이에 반대했고 결국 추가종목을 논의하게 되었다.
대회를 앞두고 추가된 스포츠는 줄다리기, 사이클, 펜싱, 축구, 승마, 잔디 테니스, 조정, 사격, 스케이트, 요트였다. 하지만 스케이트는 동계스포츠라는 이유로 제외되었고, 대신 이색적인 예술대회(Art competitions)가 추가되었다.
이 올림픽 예술대회는 1912년부터 1948년까지 근대 올림픽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 남작의 주도로 비공식 종목으로 경쟁했다. 그는 신생대회인 올림픽이 문화, 이념적으로 강력하게 자리잡기를 원했고 예술과 결합된 정신적인 스포츠의 구현이 바로 이 종목이라고 주장했다.
예술대회는 크게 문학, 조각, 회화, 건축, 음악 등 예술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종목들이 포함되었다. 1912년 올림픽 예술 문학부문의 금메달 수상자는 ‘Ode to Sport’라는 시를 적어낸 조르주 호로드 & 마틴 에슈바스(Georges Hohrod and Martin Eschbach)라는 독일 국적의 공동 출품자들이었는데, 사실 이는 쿠베르탱 남작이 가명으로 출전한 것이었다.
▲ 피에르 드 쿠베르탱(1863~1937)
예술대회는 주제가 ‘스포츠’에 국한되다 보니 좋은 작품의 출현에 한계가 있었고, 그렇다고 이미 저명한 예술가를 대상으로 하기에는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하는 올림픽에 어울리지 않았다. 심사위원들의 주관적인 심사에 대한 지속적인 불만과 예술 관련상이 널렸는데 이를 올림픽에서까지 시상한다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여론이 일어나면서 결국 폐지되었다.
현재 IOC에서는 예술대회의 존재는 아예 모른 척할 정도로 사실 스포츠의 제전인 올림픽에 있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종목이었다.
4. 올림픽 입성을 노리는 새로운 종목들
e스포츠
20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올림픽이 아니라 PC방에서나 경쟁해야 했을 e스포츠는 그 위상이 달라져 이제는 올림픽 입성을 위해 지속적인 시범행사를 갖고 있다.
▲ e스포츠 대회
2016년 리우 올림픽과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비공식 종목으로 열렸고, 올림픽은 아니지만 2022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정식종목이 되었다.
2020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IOC는 공식적으로 ‘올림픽 가상 시리즈(OLYMPIC VIRTUAL SERIES)‘를 추진한 바 있다. IOC는 2024년 파리올림픽의 새로운 추가 종목으로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하고 있지만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e스포츠의 올림픽 입성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우슈(Wushu)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비공식 종목으로 선보였다. 중국의 전통무술에서 파생된 종목으로 1994년 중국 정부에 의해 표준화된 스포츠로 개발되었다.
▲ 우슈(Wushu)
당시 12개의 금메달 중 중국이 8개의 금메달을 따냈으며 홍콩이 2개, 러시아가 2개를 땄다.
보사볼(Bossaball)
얼핏 배구와 비슷한 경기장 분위기에 축구와 체조, 음악, 카포에이라가 결합된 게임으로 2005년 벨기에의 필립 아이크만스(Filip Eyckmans)가 개발하였다.
▲ 보사볼(Bossaball)
트램펄린이 네트 양쪽에 있어 고공 플레이가 가능해 볼거리가 많으며,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비공식 시연을 통해 꽤 많은 인기를 끌었다. 당시 대회에서는 네덜란드가 우승했다.
풋발리(Footvolley)
비치발리볼과 축구를 결합한 운동으로 족구를 연상시키는 이름 그대로 ‘발배구’다. 비치발리볼이 1992년 시범경기에 이어 1996년 정식종목이 된 것을 감안하면 풋발리에게도 영광의 날이 곧 올지도 모른다.
▲ 풋발리(Footvolley)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비공식 종목으로 선을 보였고, 당시 3일간 열린 토너먼트에 24개국이 참가해 남자부에서는 파라과이, 여자부에서는 브라질이 우승했다. ‘인간 번개’ 우사인 볼트가 풋발리의 지지자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