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 조선귀족, 청년 자작 박부양(朴富陽)

박부양(朴富陽, 1905~1974)은 을사오적 중의 한 명인 박제순(朴齊純)의 아들로 부친의 사망 이후 자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때가 1916년이니 박부양의 나이 불과 12세였다. 1921년 5월 7일에는 모친 대구 서씨가 사망하면서 그는 17세의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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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부양의 부친 박제순(1858~1916)


이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조선귀족으로써 자작의 지위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조선귀족들이 몰락하는 가운데서도 5만 원 이상의 재산을 물려받아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약관의 나이에 모든 것을 다 가진 박부양은 이 시기 ‘청년 자작’으로 불리며 여러 건의 사건사고를 일으켰다.

 

사고뭉치 청년귀족, 박부양

 

– 1925년 5월 17일 오후 4시 20분경, 박부양은 자동자전차(오토바이) 뒷자리에 이모 씨를 태우고 가던 중, 원남동 총독부의원 앞에서 평산목장(平山牧場)의 마차와 추돌하였다.

 

이때 인도로 가고 있던 여성 곽모씨가 방향을 잃은 오토바이에 부딪혀 전치 1개월의 중상을 당하였으나 박부양은 서대문 경찰서에 불려 간 다음 훈방 처리되었다. 【每日申報 1925.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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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당시, 20대 조선인 청년으로는 꿈도 못 꿀 오토바이 운전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박부양은 사고도 심심치 않게 냈다. 사고 발생 이후 귀족이라는 이유로 너무나도 쉽게 훈방되는 모습이다.

 

– 1925년 9월 22일 새벽 1시, 일행 6명과 술에 취해 자동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던 박부양은 현저동에 있던 악박골 약수터에서 근방에 사는 남자들이 자신을 ‘히야까시(ひやかし, 희롱)’했다는 것을 이유로 패싸움을 일으켰다.

 

이에 서대문 경찰서 관내 파출소가 출동하여 사건을 조사한 결과, 박부양 일행의 일방적인 폭행이었다. 이들은 즉시 입건되었으나 조사과정에서 박부양이 귀족이라는 것이 드러나자 파출소에서는 그의 체면을 봐 경고 후 훈방하였다. 【每日申報 1925.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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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에는 패싸움을 벌여 입건 후 훈방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흥미로운 것이 ‘술에 취해’ 운전을 했는데도 그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는 부분으로, 음주운전 처벌이 없었던 시기의 살벌한 풍경이다. 물론 교통량이 현재보다 현저히 적어서 사고 자체는 매우 적었던 시절이다.

 

현재와 같이 음주운전을 금지하는 도로교통법은 1961년 12월 31일 제정되었다.

 

– 1925년 12월 14일 오후 2시, 박부양은 오토바이에 엄복동(嚴福童), 김성기 두 사람을 태우고 직접 운전하며 광화문 경찰관 강습소 앞을 지나가다가 정상석탄상회(井上石炭商會)의 자전차와 정면충돌해 운전자 이홍창(李弘昌)이 혼수상태에 빠졌고 박부양은 종로경찰서에 입건되었다. 【每日申報 192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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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12월 또 한 번 교통사고를 일으킨 박부양. 뒤에 타고 있는 엄복동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전차왕 엄복동(1892~1951)이 맞다.

 

박부양은 20대 초반답게 스포츠에 관심이 많아 1925년 7월에 조직된 농구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그의 집을 협회사무실로 쓰기도 했다. 당연히 192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달렸던 엄복동과도 안면이 있었을 것이고, 함께 어울리며 자전거와 비슷한 두발 달린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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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할리데이비슨 광고 【朝鮮新聞 1926.10.13】


그런데 정면충돌을 하고도 중상을 당하는 상대 운전자와는 달리 박부양 일행은 멀쩡한 모습인데, 아마도 귀족답게 위와 같은 최고급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을 것이다. 100여 년 전 조선에는 오늘날에도 명품으로 대우받는 오토바이들이 판매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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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형 트라이엄프 모터사이클 광고 【京城日報 1928.08.22】

 

일제에 대한 충성


이처럼 20대 초반의 박부양은 행동을 제어할 부모가 없었기에 문제아 청년귀족으로 수차례 언론에 오르내렸다. 젊은 나이에 돈이 많아 요리점과 기생집 출입이 빈번했고,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사고를 일으켜 피해를 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1920년대 후반부터는 사건사고란에서 박부양의 이름은 사라졌는데, 사람이 갑자기 달라지기는 어려운 것이고 아마도 신문지상에 오를만한 사고는 치지 않았거나 혹은 물려받은 재산을 흥청망청 써버려서 더 이상 호화로운 취미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일제 말기에 지방관리 신분이 된 박부양은 적극적인 친일행각으로 언론에 재등장한다.

 

1937년 9월 3일, 조선 청년귀족들이 모여 만든 친일단체 동요회(同耀會)는 귀족과 명문가정으로부터 국방헌금 1만 원을 모아 조선총독부에 헌납하고 조선신궁에 참배하였다. 이때 총독실을 방문한 동요회 이사진 중 한 명이 박부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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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헌금을 헌납하는 동요회 【매일신보 1937.09.04】


이들의 기특한(?) 모습에 미나미 지로(南次郎) 총독은 다음과 같이 활약을 격려했다.

 

“금후 더욱 시국을 인식하여 내선일체의 실을 거양하라. 그리고 황실에서도 이렇게 조선에서 청년귀족이 중심이 되어 활약한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매우 기꺼워하실 것이다.”

 

또한 같은 해 박부양의 부인도 조선 부녀로 구성된 황군원호단체인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의 발기인으로 참석하는 등 부창부수의 길을 걸었는데, 당연히 저명인사였던 남편의 이름을 걸고 활동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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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군수 재직 당시의 박부양(1940년)


1942년 5월 9일에는 일제가 조선인들에 대한 징병제를 실시하자 ‘황은의 한없이 거룩함에 멸사봉공할 것을 굳게 맹세하고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기 위해’ 5월 23일에 열린 매일신보 주최의 ‘징병제도실시 감사축하대회’에 초청인사로 참여하는 등 충성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천황에게 진충보국을 다짐한 그의 권유로 아들 박승유(朴勝裕, 1924~1990)도 일본군에 입대한다. 하지만 박승유는 입대 한 달 후인 1944년 11월 3일 탈영하여 한국광복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박부양의 입지는 크게 추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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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3월, 미국 유학 후 돌아온 박승유


하지만 불과 8개월 후 일제가 패망하면서 이는 박승유의 ‘신의 한 수’가 되었고, 이로 인해 잠시나마 가문의 망신이었을 박승유는 조부와 부친의 과오를 씻고 건국훈장 애족장 수상과 함께 대한민국의 애국자로서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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