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예술과학국가상 제정의 배경과 유래

‘반역자’ 카를 폰 오시에츠키


독일예술과학국가상(Deutscher Nationalpreis für Kunst und Wissenschaft, German National Prize for Art and Science)은 노벨상에 대항하기 위해 1937년 제3제국에서 창설된 상이다.

 

1935년 노벨상 수상자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Carl von Ossietzky)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항의하기 위해 제정된 본 상은 총 9명의 인물에게만 수여된 제3제국 최고 권위의 상이다.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반전운동을 주도하던 저널리스트이자 평화주의자였던 카를 폰 오시에츠키는 이후 민주주의, 페미니즘, 사회주의 원칙 하에 활발한 저술 언론활동을 펼쳤다. 1932년에는 공산당 후보였던 에른스트 텔만(Ernst Thälmann)의 대선운동을 지원할 정도로 공산주의와 관계를 맺었다.

 

독일예술과학국가상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이 금지된 상황에서 이를 대신할 상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1
▲ 죄수번호 562번, 카를 폰 오시에츠키


독일의 영토와 권리를 침해하며 독일에 대한 보복을 골자로 한 베르사유조약에 대해 독일 국민 모두는 반감을 표시하였고, 유약함의 대명사 바이마르 정권마저도 연합국 승전국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전쟁배상금과 굴욕적 조항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였으며 독일 군부는 자주권을 위해 비밀리에 재무장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31년 오시에츠키는 독일의 반(反) 베르사유적 움직임을 폭로하게 된다. 주된 내용은 독일이 베르사유조약을 위반하고 있으며, 독일 군부가 소련과의 밀약 하에 비행 및 전차기동훈련을 실시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오시에츠키는 바이마르 정권 하에서 반역 및 간첩 혐의로 기소되어 18개월형을 선고받는다. 이같은 행위는 명백한 반국가적 좌파의 반역행위로 1992년 독일 연방법원에 의해 재확인되었다.

 

국가가 은밀하게 진행한 행위는 위법성이 있어도 비밀엄수의 원칙을 상쇄하지 않는다. 모든 시민은 조국에 대해 정보에 관한 충성의 의무를 가지며, 기존 법률의 집행에 대한 노력은 외국 정부에 대한 호소가 아닌 책임감 있는 국가기관의 활용을 통해 구현될 수 있다.

 

– 독일 연방법원 판결 1992년 12월 3일. 오스에츠키 측 항소에 대한 기각.

 

독일예술과학국가상 제정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이 집권하자 오시에츠키는 반정부 운동을 더욱 거세게 선동하였다.

 

수권법 통과 이후 게슈타포에 의해 사상범으로 체포된 오시에츠키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서구 열강의 여론이 조성되고 결국 1935년 노벨위원회로부터 노벨평화상이 결정되었다. 수용소 수감 중에 수상이 결정되어 상을 받지는 못했으나 질병을 이유로 풀려난 후 방문하여 1936년 또다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나치 정부는 반역자에 대한 노벨평화상 수상 결정은 명백한 국권침탈이자 내정간섭이라 규정하고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하였다. 이후 독일 정부는 노르웨이 점령 직후 오시에츠키의 수상을 결정한 노벨평화상 위원들을 전격 체포하기도 하였다.

 

독일예술과학국가상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이 금지된 상황에서 이를 대신할 상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일예술과학국가상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이 금지된 상황에서 이를 대신할 상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3
▲ 독일예술과학국가상 펜던트


독일예술과학국가상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펜던트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수상자에게는 메달과 상패 이외에 10만 제국마르크(Reichsmark)의 상금(현재가치 50~60만 달러)이 수여되었다.

 

제3제국 기간 동안 총 9명의 수상자를 배출하였으며 1937년과 1938년 두 번에 걸쳐 수상이 발표되었고, 시상식은 각 이듬해 1월 30일 정권 획득 기념일을 맞아 총리 관저에서 거행되었다.

 

1937년 9월 7일 수상자 발표 (시상일: 1938년 1월 30일)


1. 건축가 파울 루트비히 트루스트(Paul Ludwig Troost, 1878~1934) – 사후 시상

독일예술과학국가상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이 금지된 상황에서 이를 대신할 상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5
▲ 파울 루트비히 트루스트


2. 나치당 대외정책 제국 지도자 알프레트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 1893~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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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3. 남극 탐험가 빌헬름 필히너(Wilhelm Filchner, 1877~1957)

독일예술과학국가상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이 금지된 상황에서 이를 대신할 상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9
▲ 빌헬름 필히너


4. 의사 아우구스트 비어(August Bier, 1861~1949) | 페르디난트 자우어브루흐(Ferdinand Sauerbruch, 1875~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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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구스트 비어

 

독일예술과학국가상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이 금지된 상황에서 이를 대신할 상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13
▲ 페르디난트 자우어브루흐

 

1938년 9월 6일 수상자 발표 (시상일: 1939년 1월 30일)


1. 토트 조직 대표이자 건설가 프리츠 토트(Fritz Todt, 1891~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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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츠 토트


2. 자동차 기술자 페르디난트 포르셰(Ferdinand Porsche, 1875~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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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디난트 포르셰


3. 항공기술자 빌헬름 메서슈미트(Wilhelm Emil Messerschmitt, 1898~1978) | 에른스트 하인켈(Ernst Heinkel, 1888~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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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헬름 메서슈미트 | 에른스트 하인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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