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2월 29일

역사적인 사진의 뒷이야기 ㊹ 숨길 수 없는 연기력, 레오 로이스(Leo Reuss)

숨길 수 없는 재능 ‘낭중지추(囊中之錐)’


낭중지추
(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숨어있어도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고사성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배우 레오 로이스(Leo Reuss)는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비록 유대인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을 때였지만 1차 대전 최전방 참전용사였던 그는 특별규정 덕분에 연기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오디션에서 막스 감독은 우습게 본 시골 농부의 연기력이 출중한 것에 놀라버렸고 그를 소설 '엘제양(Fräulein Else)'을 각색한 무대를 준비하던 비엔나의 에른스트 로타르(Ernst Lothar)에게 추천하기까지 했다. 1
▲ 레오 로이스


하지만 독일인들의 차별은 참전용사이건 아니건 유대인에게는 예외를 두지 않았다. 1930년대에 반유대주의가 극으로 치닫고 나치 정권의 힘이 강해지면서 그는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1935년, 뉘른베르크 법이 시행되자 결국 로이스는 일자리를 찾아 오스트리아로 돌아왔다. 하지만 전쟁 후에 그는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선택하지 않았고 결국 무국적자인 유대인 신분으로는 고국에서도 배우로 활동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연기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로이스는 현실연기를 시작했다.

 

산속 오두막으로 들어간 그는 머리카락과 수염을 잔뜩 기르고 티롤(Tyrol) 산골 출신 농부들의 사투리와 행동을 익혔다. 심지어 열흘마다 과산화수소로 머리카락과 몸의 털을 탈색시켰고, 지인의 증명서류까지 얻어 완벽하게 다른 인생을 창조해냈다.

 

오디션에서 막스 감독은 우습게 본 시골 농부의 연기력이 출중한 것에 놀라버렸고 그를 소설 '엘제양(Fräulein Else)'을 각색한 무대를 준비하던 비엔나의 에른스트 로타르(Ernst Lothar)에게 추천하기까지 했다. 3
▲ 변장을 마친 모습


스스로 만족할만한 변신을 했다고 판단한 로이스는 연극감독이었던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의 오디션에 도전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함께 일한 적이 있었기에 연기테스트와 변장테스트 두 가지를 동시에 받는 셈이었는데 막스는 로이스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오디션에서 막스 감독은 우습게 본 시골 농부의 연기력이 출중한 것에 놀라버렸고 그를 소설 ‘엘제양(Fräulein Else)’을 각색한 무대를 준비하던 비엔나의 에른스트 로타르(Ernst Lothar)에게 추천하기까지 했다.

 

에른스트 감독 역시 로이스의 연기를 보자마자 곧바로 ‘아리아인’ 역할의 주연배우로 발탁했다.

 

오디션에서 막스 감독은 우습게 본 시골 농부의 연기력이 출중한 것에 놀라버렸고 그를 소설 '엘제양(Fräulein Else)'을 각색한 무대를 준비하던 비엔나의 에른스트 로타르(Ernst Lothar)에게 추천하기까지 했다. 5
▲ 무대에서 열연을 하는 로이스. 원숙한 연기는 동료연기자들의 의심을 샀다.


1936년 12월 2일, 비엔나의 요제프슈타트(Josefstadt)극장에서 데뷔한 시골 농부는 대찬사를 받았고, 언론은 ‘저녁의 센세이션‘, ‘오스트리아 알프스산골의 미천한 농부가 당대의 가장 훌륭한 타고난 배우가 되다‘라고 호들갑을 떨며 그를 미래의 스타로 치켜세웠다.

 

하지만 연기를 하기 위해 필사적인 변장을 했던 로이스는 나치의 찬사가 쏟아지고 꽃길이 깔리자 ‘공허함과 외로움‘을 느낀다.

 

같은 사람이 유대인이 아니라 아리아인이라는 이유로 대접이 달라지는 것을 통해 극단으로 치닫는 파시즘과 나치의 권력이 상상 이상으로 높아지고 있다는 징후를 느낀 그는 결국 일주일 뒤 가면을 벗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오디션에서 막스 감독은 우습게 본 시골 농부의 연기력이 출중한 것에 놀라버렸고 그를 소설 '엘제양(Fräulein Else)'을 각색한 무대를 준비하던 비엔나의 에른스트 로타르(Ernst Lothar)에게 추천하기까지 했다. 7
▲ 정체를 밝힌 로이스


진실이 밝혀지자 그에게 찬사를 보내던 사람들은 분노와 동시에 ‘유대인이 감히 오스트리아 원주민을 가장한 것‘을 심각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결국 1937년 1월 ‘문서위조 및 신분 도용 혐의‘로 로이스는 히칭(Hietzing)지방법원에 출두하여 재판을 받았고, 100실링의 벌금과 48시간의 조건부 체포를 선고받았다.

 

오디션에서 막스 감독은 우습게 본 시골 농부의 연기력이 출중한 것에 놀라버렸고 그를 소설 '엘제양(Fräulein Else)'을 각색한 무대를 준비하던 비엔나의 에른스트 로타르(Ernst Lothar)에게 추천하기까지 했다. 9
▲ 재판정의 레오 로이스


이후 그는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해 라이오넬 로이스(Lionel Royce, 1891~1946)로 개명하고 9년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다행히 나치 독일의 몰락을 모두 지켜본 그는 1946년 4월 1일, 미국위문협회(USO)소속으로 필리핀에 주둔해 있던 미군들을 위한 위문공연 중 마닐라에서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