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막바지, 독일 뎀민(Demmin)의 집단자살 미스터리

베를린과 독일 전역의 집단자살


나치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5년 4월에서 5월까지 독일에서는 ‘집단자살’이 대유행했다. 평시라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사연은 제각각이겠지만 이 기간 독일인들이 삶을 포기한 것은 죽어가는 제3제국의 운명과 함께 한 것이라는 점에서 시대가 낳은 비극적 장면이었다.

 

1945년 초, 베를린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Kaiser Wilhelm Memorial Church)의 목사 게르하르트 야코비(Gerhard Jacobi)는 신자들에게 ‘앞으로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자살 전염병」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며 이 현상을 미리 예견했다.

 

야코비 목사는 조상 중 유대인이 있었고, 폴란드 침공과 점령 작업에도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불참함으로써 ‘유대인을 옹호하는 목사’로 간주되어 나치 광신도들에게 린치를 당하기도 하는 등 ‘민족공동체’에 속하기를 거부한 비유대인 독일인이었다.

 

그런 야코비 목사의 시각에서 전체주의 나치 독일국민들이 패전이라는 절벽으로 밀려났을 때 취할 다음 행동은 뻔히 보였을 것이다.

 

추정에 따르면 1945년 4월 30일부터 5월 4일까지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 1200~250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당시 뎀민인구가 약 15,000~16,000명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평균 7명 중 1명이라는 엄청난 수치이다. 1
▲ 게르하르트 야코비(Gerhard Jacobi, 1891~1971)


패전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치 정권은 국민들에게 공공연하게 폭력적 죽음을 미화하며 자살을 권장했다. 실제로 수많은 지역 주민들이 야코비 목사에게 비상시(독일의 패망)를 대비해 제공된 독약앰플이 있다고 고백을 해오는 사례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945년 2월경 체코 영토에 뿌려진 나치의 전단에는 ‘소련군의 승리는 증오와 약탈, 굶주림, 총살, 추방, 인종 박멸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였고, 독일 남성들에게 “독일 여성과 소녀들을 치욕과 살육으로부터 구원(?)하라”고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1945년 4월 말, 소련군이 베를린 외곽을 포위하고 주둔하자 야코비 목사의 두려움은 실체로 다가왔다. 독일국민들은 지역 당국에서 제공한 청산가리를 삼키고, 정맥을 긋고, 목을 매고, 물에 몸을 던지고, 총을 쏘는 등 저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이유는 단 하나, 공포에서 비롯된 절망감이었다. 그들은 전후 베를린의 끔찍한 결과에 직면하기보다는 건물에서 뛰어내리거나 약을 먹었다.

 

추정에 따르면 1945년 4월 30일부터 5월 4일까지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 1200~250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당시 뎀민인구가 약 15,000~16,000명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평균 7명 중 1명이라는 엄청난 수치이다. 3
▲ 베를린 시내로 진군하는 소련탱크와 이를 바라보는 독일여성들 ⓒEvgeny Khaldei


1949년 편찬된 ‘Berlin in Figures’의 통계에 따르면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만 최소 7,000명이 자살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하지만 자살과 타살이 교묘하게 결합된 경우도 있기 때문에(가족들을 죽이고 본인은 자살에 실패한 경우 등) 일부 전문가들은 이를 과소평가된 수치라고 판단하고 있다.

 

당시의 목격담과 다양한 출처를 종합하면 최소 만 명에서 십만 명의 베를린 시민들이 자살을 실행했다는 것이 정설로 간주되고 있다.

 

독일인들이 유행처럼 동시에 목숨을 버리게 된 절망감은 어디에서 왔을까.

 

당시 독일 측은 이 현상의 모든 원인이 ‘소련의 붉은군대가 점령지에서 취하는 행동이 주는 공포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이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독일의 역사가 플로리안 후버(Florian Huber)는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역설하고 있다.

 

• 나치 독일에 대한 광신적 애국주의.

• 소련과 연합군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 국가사회주의와 같은 전체주의 체제에서 조국의 패망으로 인한 패배감.


그리고 여기에 더해 연예인과 같은 유명인이 자살했을 때 자신의 처지와 동일시하면서 모방 자살하는 것을 의미하는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까지 더해지며 유행처럼 번진 것으로 보고 있다.

 

후버는 “절망적인 분위기가 사회를 덮쳤을 때 카페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자살하기 시작한다면 누구나,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이라도 자살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당시 독일인들은 나치의 노선과 자신의 세계관이 일체화된 삶을 살고 있었기에 총통 히틀러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마치 도박꾼이 마지막으로 갖고 있던 카드에 올인했다가 희망이 무너지면서 감정이 극으로 치닫는 것과 같은 상태로 흘러갔다.

 

소도시 ‘뎀민’의 집단자살


종전 후 독일의 도시들 중 자살건수 1위를 차지한 곳은 당연히 독일 최대의 도시이자 수도 베를린이었다. 하지만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Mecklenburg-Vorpommern)에 위치한 ‘뎀민(Demmin)’이라는 작은 도시가 비율상으로는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해 충격을 주었다.

 

추정에 따르면 1945년 4월 30일부터 5월 4일까지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 1200~250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당시 뎀민인구가 약 15,000~16,000명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평균 7명 중 1명이라는 엄청난 수치이다.

 

이 작은 도시가 다른 곳보다 더 심한 절망에 빠졌던 것은 지리학적인 이유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뎀민은 북부와 서부를 페네 강, 남부는 톨렌제 강으로 둘러싸인 섬과 같은 곳이었다. 이곳에 주둔하던 독일군은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강에 있는 다리를 다 폭파하고 달아났다. 계획대로 소련군은 주춤했지만 뎀민 시민들도 함께 고립되었다.

 

추정에 따르면 1945년 4월 30일부터 5월 4일까지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 1200~250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당시 뎀민인구가 약 15,000~16,000명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평균 7명 중 1명이라는 엄청난 수치이다. 5
▲ 뎀민의 위치


뎀민 주민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독일 동부지역은 나치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정치문화적으로 민족적 투쟁의 무대였고 독일과 유럽 언론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을 늘 잔혹하게 묘사해왔기 때문이었다.

 

나치 독일이 선전으로 주입한 소련군은 미개한 곰, 강간범, 살인자의 이미지였기에 붉은 군대가 시내에 들어서면 끔찍한 일이 닥칠 것이라고 생각한 주민들은 주저 없이 극단적인 방법을 시행했다. 실제로 1995년 독일 포커스지의 조사에 따르면, 약 700~1000명의 뎀민 시민들이 소련군이 도착하자마자 자살을 택했다.

 

물론 점령지에서 소련군의 포악한 행동도 자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이 입성하기 전 나치관료들은 소방차를 몰수해 달아나고 병원과 경찰도 함께 서둘러 대피했다. 교회에 백기가 게양된 것을 본 소련협상단은 전투 없이 투항하면 어떤 약탈행위도 없을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도시에 남아있던 히틀러 유겐트(Hitlerjugend)와 나치광신도들이 총을 쏘며 저항했고, 이에 소련군은 여성들에게는 강간을, 저지하는 독일 남성들에게는 총살이라는 대가를 돌려주었다. 사흘간 약탈과 방화로 도시의 80%가 파괴되었고, 수치심으로 인해 자살한 여성과 해당 여성의 가족들이 나머지 자살 숫자를 차지했다.

 

집단자살이 일어난 지 몇 주가 지난 후에도 도시를 흐르는 페네 강변에는 시신이 떠다녔고, 익사자들의 의류와 소지품들이 강둑에 가득 모여있는 끔찍한 시기였다.

 

추정에 따르면 1945년 4월 30일부터 5월 4일까지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 1200~250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당시 뎀민인구가 약 15,000~16,000명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평균 7명 중 1명이라는 엄청난 수치이다. 7
▲ 지금은 잔잔한 페네강


독일 동부가 전후 공산진영에 속하면서 이 사건에 대한 논의는 금기가 되었다.

 

집단자살자들이 묻힌 공동묘지는 방치되었고 일부는 사탕무 농장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소련군의 만행을 들추는 끔찍한 이야기 대신, 지역에서 독일군과 싸우다 사망한 영웅들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들어섰다. 뎀민의 파괴는 동독이 붕괴한 1989년까지 모조리 퇴각하던 독일군과 히틀러 유겐트의 짓으로 기록되었다.

 

추정에 따르면 1945년 4월 30일부터 5월 4일까지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 1200~250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당시 뎀민인구가 약 15,000~16,000명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평균 7명 중 1명이라는 엄청난 수치이다. 9
▲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패

 

오늘날 뎀민의 교회에서는 매년 5월 5일이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레퀴엠(Requiem)’이 울려 퍼진다. 1945년 봄에 일어난 비극적인 광기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고요한 애도와 기억의 표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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