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최초의 공개구혼, 윤치오와 윤고라 부부

대한제국 학부(현재의 교육부와 비슷한 관청) 학무국장이었던 윤치오(尹致旿, 1869~1950)는 부인 이숙경(李淑卿, 1869~1907)과 1907년 1월 26일 사별한 뒤, 그해 말에 신문을 통해 재혼할 상대를 찾는 광고를 내걸었다.

 

결혼 후 김고라는 남편의 성을 따라 윤고라(윤고려라고도 알려져 있다)로 개명하였고, 신여성답게 교육계에 뛰어들어 여성계몽운동에 나섰으나 안타깝게도 1913년 12월 28일, 향년 22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1
▲ 윤치오 부인의 별세를 알리는 공고 【황성신문 1907.01.28】

 

사실 윤치오의 위치 정도로 보면 재혼상대는 명문가의 딸들 중에 적당한 인물을 조용히 선택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교육의 일선에 있는 학무국장답게 공정하고 객관적인 공개구혼을 통한 모범적인 태도를 보이려 했던 것 같다.

 

명문가끼리의 결혼에 자유연애관이 끼어들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시대를 감안하면 조금이라도 열린 면접(?)이었던 셈이다.

 

아래는 공개구혼 광고를 한 뒤 반응을 알리는 기사이다.

 

결혼 후 김고라는 남편의 성을 따라 윤고라(윤고려라고도 알려져 있다)로 개명하였고, 신여성답게 교육계에 뛰어들어 여성계몽운동에 나섰으나 안타깝게도 1913년 12월 28일, 향년 22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3
▲ 공개구혼의 결과를 알리는 단신

 

– 여자들의 청혼(女徒請婚, 여도청혼)

학부 학무국장 윤치오 씨가 속현차(續絃次)로 규수를 구하는데, 가정학과 신학(新學)이 풍부한 처자를 구하는 고로, 이화학당(梨花學堂) 학도와 교우(敎中) 처자들이 청혼한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08.01.01】

속현차(續絃次): 현악기의 끊어진 줄을 잇는다는 뜻으로, 아내와 사별하고 두 번째 아내를 구한다는 의미


하지만 아무리 공개구혼이라 해도 학무국장과의 결혼 경쟁에 뛰어들려면 어느 정도 무언의 커트라인이 존재했을 것이다. 결국 1월 중순경 윤치오가 선택한 여성은 당시 인천부윤(시장) 김윤정(金潤晶, 1869~1949)의 딸 김고라(金高羅)였다.

 

결혼 후 김고라는 남편의 성을 따라 윤고라(윤고려라고도 알려져 있다)로 개명하였고, 신여성답게 교육계에 뛰어들어 여성계몽운동에 나섰으나 안타깝게도 1913년 12월 28일, 향년 22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5
▲ 조바위를 쓴 김고라(윤고라)

 

1891년생으로 10대 후반이었던 김고라는 과거 외교관으로 미국에서 생활했던 부친 김윤정을 따라 해외에서 공부를 한 신여성이었다. 흥미롭게도 사위 윤치오와 장인 김윤정의 나이가 동갑인데, 그나마 6월 25일생인 김윤정이 9월 10일생인 윤치오보다 생일은 빠르다.

 

결혼 후 김고라는 남편의 성을 따라 윤고라(윤고려라고도 알려져 있다)로 개명하였고, 신여성답게 교육계에 뛰어들어 여성계몽운동에 나섰으나 안타깝게도 1913년 12월 28일, 향년 22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7
▲ 사위와 장인. 윤치오(좌), 김윤정(우)

 

1908년 2월 3일 오후 2시, 정동 감리회당(현재 정동제일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인천 송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오며 완전한 부부가 되었다.

 

결혼 후 김고라는 남편의 성을 따라 윤고라(윤고려라고도 알려져 있다)로 개명하였고, 신여성답게 교육계에 뛰어들어 여성계몽운동에 나섰으나 안타깝게도 1913년 12월 28일, 향년 22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9
▲ 양장을 한 김고라(윤고라)

 

결혼 후 김고라는 남편의 성을 따라 윤고라(윤고려라고도 알려져 있다)로 개명하였고, 신여성답게 교육계에 뛰어들어 여성계몽운동에 나섰으나 안타깝게도 1913년 12월 28일, 향년 22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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