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의 딸 ⑩ 심상훈의 손녀, 심재순

심상훈(沈相薰, 1854~1907)은 조선 말기 수구파에 속한 관료로 민비(명성황후)의 친족인 유력가였다.

 

개화파와 대립한 인물이기에 친일의 이력은 없으나 오늘날 재무부와 같은 탁지부의 대신으로 있으면서 국가의 재정악화를 초래한 백동화(白銅貨) 주조에 관여하면서 평가는 그다지 좋지 못한 인물.

 

1926년 신문에 소개된 심상훈의 손녀 심재순(沈載淳)은 당시 19세로 이화전문학교 영문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녀의 외조부는 한규설로 지난 편의 ‘한일순‘과는 친척인 셈.

 

1926년 신문에 소개된 심상훈의 손녀 심재순(沈載淳)은 당시 19세로 이화전문학교 영문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녀의 외조부는 한규설로 지난 편의 '한일순'과는 친척인 셈. 1
▲ 심재순 (沈載淳, 1908~1990)

 

심재순은 유복한 집안에서 전문학교까지 진학을 하였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휴학을 한 상태였다. 문학적 재능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서 그녀가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현 숙명여고) 4학년에 재학 중일 때 지은 시도 함께 소개되었다.

 

오늘 소개할 분은 신성(神聖), 그것과 같이도 고아한 자태를 가진 심재순(沈載淳) 양이올시다.

 

심재순 양은 이제는 이 세상을 떠난 심상훈(沈相薰)씨의 손녀요, 일찍이 참정대신을 지낸 한규설(韓圭卨)씨의 가장 사랑하는 외손녀가 되니, 불면 날아갈라 추우면 꺼질세라 곱게곱게 길러 이제는 19세의 꽃다운 가을을 맞이하기에 이른 것이올시다.

 

그는 일찍이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문학과 미술에 취미가 깊어 이화전문학교 문과에서 순결히 빛나는 예술의 천재를 비단결 같은 가슴속에 수를 놓더니 최근 은근 건강을 해하여 당분간 가정에서 몸을 쉬고 있는 중이올시다.

 

서대문정 일정목(현 신문로 1가) 심재순 양의 집에는 그를 사랑하시는 어머니, 아버지(심규섭)가 함께 계시니 그의 가슴에 빛나는 평화는 그의 전 생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올시다.

 

이제 그가 얼마나 문학에 대한 재주를 가졌는가. 숙명여학교 4학년 시대의 작품 하나를 소개하고 이 글을 맺고자 합니다.

【매일신보 1926.10.31】


■ 아리땁던 과거

푸른 하늘엔 수없는 성광(星光)
아득한 전등빛이 방을 비칠 때,

 

가냘픈 나의 가슴 마음의 겨울
아리땁던 옛 꿈은 거듭 비친다.

 

별빛은 옛이나 다름없거늘
옛 꿈을 그리는 나의 가슴에
뜻아닌 적막은 가로 흐른다.

 

그리워 그리워 가슴 저리는
소녀의 옛 꿈은 찾을 길 없네.

 

유치진과의 결혼, 서울예대 설립


이화여전 영문과를 1년 다니고 휴학 중이던 심재순은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여자미술학교를 3년간 다녔다. 귀국한 뒤에는 경성여자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이때 영어교사로 있던 유치진(柳致眞, 1905~1974)을 만나게 된다.

 

1926년 신문에 소개된 심상훈의 손녀 심재순(沈載淳)은 당시 19세로 이화전문학교 영문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녀의 외조부는 한규설로 지난 편의 '한일순'과는 친척인 셈. 3
▲ 신춘문예 수상 당시의 모습

 

시인 유치환의 형이자 극작가인 유치진은 가냘프지만 명랑한 ‘신여성‘ 심재순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가난한 그에게 부잣집 출신의 도도한 심재순은 범접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게다가 심재순은 그녀의 말에 따르면 지독한 독신주의자였다. 항상 첨단패션만을 입고 다니던 명문가 신여성으로서는 당시 얼굴도 모르고 결혼하는 수많은 부부들을 보면서 비혼주의자가 된 것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이후 유치진은 교사생활을 접고 극예술연구회의 후원으로 동경에서 연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운명처럼 일본에 온 심재순과 재회하였다. 미술공부를 위해 도일한 심재순은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서 ‘줄행랑에 사는 사람들‘로 일등을 수상하는 다재다능함으로 그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1926년 신문에 소개된 심상훈의 손녀 심재순(沈載淳)은 당시 19세로 이화전문학교 영문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녀의 외조부는 한규설로 지난 편의 '한일순'과는 친척인 셈. 5
▲ 1935년 2월 10일, 동경에서 열린 신춘문예 당선축하회. 앞 줄 ‘X’ 표시가 심재순


함께 연극과 영화를 보며 우정을 쌓던 두 사람은 몸이 약하던 심재순이 타지에서 병을 앓게 되자 유치진이 극진히 간호하면서 깊은 사랑으로 변했고, 결국 1936년 8월 8일 외금강 온정리 신계사(神溪寺)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26년 신문에 소개된 심상훈의 손녀 심재순(沈載淳)은 당시 19세로 이화전문학교 영문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녀의 외조부는 한규설로 지난 편의 '한일순'과는 친척인 셈. 7
▲ 신혼시절의 부부. 유치진은 오늘날 친일논란에 쌓여있기도 하다.

 

결혼 후 심재순은 화가의 꿈을 접고 유치진의 연극활동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치진은 평생 월급을 받아본 것은 젊은시절 통영우체국에서 2개월간 일한 것이 전부였으나 심재순 덕분에 평생 극작가로만 살아갈 수 있었다.

 

1926년 신문에 소개된 심상훈의 손녀 심재순(沈載淳)은 당시 19세로 이화전문학교 영문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녀의 외조부는 한규설로 지난 편의 '한일순'과는 친척인 셈. 9
▲ 2018년 토니상을 수상한 뉴욕 라마마극단의 유미아 대표(가운데)가 그녀의 손녀로 삼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해방 후 드라마센터와 서울예대의 전신인 한국예술연구원 설립이 유치진의 업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심재순의 풍모나 재능, 아낌없는 지원으로 볼 때 그녀의 역할도 지대했던 것도 사실. 1990년 9월 17일, 83세로 별세할 때도 심재순의 영결식은 서울예술전문대학원장으로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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