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대한민국 해병대의 ‘미스 해병’ 선발 공고

1949년 4월 15일에 경남 진해에서 창설된 해병대는 10주년을 맞아 ‘대한 해병의 명예를 국내외에 널리 선양하고자 한다‘는 명목으로 이색적인 이벤트를 열었다.

 

1959년 3월 26일, 해병대 사령부 정훈감실이 언론에 배포한 10주년 기념사업공고는 바로 ‘미스 해병 선발대회‘에 관한 것이었다.

 

1959년 3월 26일, 해병대 사령부 정훈감실이 언론에 배포한 10주년 기념사업공고는 바로 '미스 해병 선발대회'에 관한 것이었다. 1
▲ 1959년, 해병대 창설 10주년 ‘미스 해병’ 모집공고


미스 해병‘ 응모자격은 1941년 4월 15일 이전에 출생한 만 18세 이상의 여성으로, 해병대 각급 부대장이 추천하는 고졸 이상의 학력과 건강미를 갖춘 미혼여성으로 제한되었다.

 

참가를 원하는 여성들은 4월 7일까지 가까운 해병대나 군부대에 다음과 같은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 자필이력서 및 학력증명서 각 1통

– 건강진단서 및 신체검사표 각 1통. 단 신체검사표에는 신장과 가슴/허리/엉덩이 측정(cm)및 체중(kg) 명시.

– 사진(전신 정면 및 상반신 정면) 4×5판 각 1매

– 해당 지역 주둔 해병 부대장의 추천서 1통

– 거주 증명서 1통


접수 요건을 보면 사실 ‘해병대 장교가 추천하는 것’ 외에는 일반 미인대회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뜬금없이 해병대에서 10주년 행사로 이런 ‘미스 해병’ 대회를 연 것은 미국에서 연례행사로 열리던 ‘미스 미국 해병대(MISS USMC)’에 친선교환으로 파견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미스 해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만큼 여군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 최선이었겠지만, 한국은 6.25 전쟁 중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여자의용군 126명이 1955년 1월 17일부로 모두 전역하였고 2001년까지 해병대에 여성은 없었다.

 

1959년 3월 26일, 해병대 사령부 정훈감실이 언론에 배포한 10주년 기념사업공고는 바로 '미스 해병 선발대회'에 관한 것이었다. 3
▲ 1950년 9월, 해병대 4기생 여성들이 진해에서 훈련을 받는 모습


반면 미국의 경우에는 1918년 오파 메이 존슨(Opha May Johnson)이 최초의 여군 해병대로 입대하였고, 1943년부터 미국 해병대 예비군은 공식적으로 여성의 입대를 허용하고 있었다.

 

1959년 3월 26일, 해병대 사령부 정훈감실이 언론에 배포한 10주년 기념사업공고는 바로 '미스 해병 선발대회'에 관한 것이었다. 5
▲ 최초의 미 여군 해병대원, 오파 메이 존슨(Opha May Johnson, 1878~1955)


당시 우승자에게는 대단한 특전도 있었다.

 

‘미스 해병’으로 선발된 여성에게는 상금 10만 환과 약 40만 환에 상당하는 부상이 주어졌으며, 가장 큰 혜택은 1959년 미스코리아 대회의 예선을 거치지 않고 본선에 직행하는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해병대는 4월 11일, 해병대 사령부 대강당에서 전국의 응모자를 모두 소집해 예선심사를 가졌다.

 

1959년 3월 26일, 해병대 사령부 정훈감실이 언론에 배포한 10주년 기념사업공고는 바로 '미스 해병 선발대회'에 관한 것이었다. 7
▲ 결선심사는 5명의 미군 해병장교와 한국 민간인 5명이 맡았다.


이후 14일 오후 2시에 8명의 결선 진출자를 놓고 한 시간 가량의 심사를 거쳐 대망의 ‘미스 해병’으로 18세의 김미자(金美子)가 선발되었고, 4월 15일에 해병대 창설 10주년 기념식 석상에서 의장대 사열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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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장대 사열을 받는 ‘미스 해병’ 김미자. 그녀는 1958년 준 미스코리아 출신이었다.


하지만 원래 목적이었던 미국으로의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더 이상 언급되지도 않았다.

 

당시 한국은 미스유니버스와 같은 미인대회에도 참가하기가 경제적으로 빠듯한 시절이었는데, 군대와 관련도 없는 ‘미스 한국 해병’을 해외의 군대 행사에 파견하는 것은 비용과 명분에서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1959년 3월 26일, 해병대 사령부 정훈감실이 언론에 배포한 10주년 기념사업공고는 바로 '미스 해병 선발대회'에 관한 것이었다. 11
▲ ‘미스 해병’ 김미자와 2위를 한 마가렛 최. 한복을 입은 여성은 한국 최초의 여류평론가 정충량(鄭忠良)여사이다.


그리고 큰 비용을 들여 미국에 가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같은 해 추석, 한반도 남부를 무자비하게 파괴한 ‘사라호‘태풍이 상륙하였다.

 

– 관련 글: ‘사라호’ 태풍과 해병대

 

이때 해병대는 태풍이 덮친 현장에 뛰어들어 인명을 구하고 피해를 복구하는 모습으로 진정한 명예를 쌓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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