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평양명기’ 장연홍의 마지막 흔적 ③

단순호치(丹唇皓齒)와 설부화용(雪膚花容)으로 풍류랑(風流郞)을 뇌쇄(惱殺)하던 평양의 명기(名妓) 장연홍은 왜 상해로 갔는가? [완결]


연홍은 속에 남모르는 굳은 결심과 부모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어떤 원대한 생각을 가슴속에 숨겨놓고 자기를 낳아준 평양 그리고 길러준 평양, 그립고도 미운 평양, 살뜰하고도 저주스러운 평양을 등지고 떠날 때에 그는 자기의 선배요 스승인 명화를 찾아가서 하룻밤을 새어가며 그 구곡(九曲)에 맺힌 설움과 늘 서로 속삭이던 자기 이상을 하소연하였던 것이다.

 

• “언니! 나는 고국을 떠나 끝없이 가려합니다. 나는 곱게 살고 뜻있는 죽음을 하라던 언니의 말씀에 정든 평양을 떠나겠습니다. 이 더럽힌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언니의 말씀에 감복하여 나는 떠나는 것이외다.”

• “언니와 다시 만나는 날이면 예전 탈을 벗고 세속의 모든 애욕을 떠나고, 야비하고 추악한 속선을 넘은 한 개 엄연(儼然)한 연홍이가 되어 언니와 대하려 합니다.”

 

이 짤막한 한마디일 망정 자기의 모든 포부를 말하고 그녀는 대동강과 을밀대를 등지고 산 설고 물 다른 되놈들의 나라 상해로 줄달음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그는 상해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이것에 대해서는 상세한 것을 쓰기를 꺼림으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자)

 

상해와 장연홍. 그것은 서로 모순이면서도 한편 잘 부합되는 명사와 명사이다. 상해와 장연홍이가 어떠한 방법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우리의 앞에 나타날지 하여간 우리는 사랑스러운 연홍의 귀여운 포부를 생각하여 악의 없이 웃으며 그 달성을 위하여 빌며 붓을 놓는다. 1
▲ 장연홍(張蓮紅, 1911~?)


그는 상해에서 지금 색다른 것을 하고 있는데 일구월심(日久月深)에 모친을 생각하고 고국 강산이 그리워 눈물과 한숨으로 지내는 중에도, 자기의 원대한 포부와 각오한 사명을 달성하고자 앞길을 바라고 오직 전진하고 있다 한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 가지 연홍으로서의 고통은 자기의 화용(花容)과 명미(明眉)에 혹한 무리들이 사방에서 마수(魔手)를 움직이고 있음이니, 자기가 할 일을 하고 나면 그만이지만 이 유혹과 꾐을 물리치려다 보니 목적한 공부가 늦어진다고 한다.

 

때로는 조선동포 또는 이국의 남자들까지 연홍을 삼키려는 성욕 붉은 입술(舌)을 날름거리는 데는 철석같은 연홍일망정 자칫하면 녹기 쉽다 한다. 그러나 이것쯤으로는 연홍의 결심을 굽힐 수는 없어 지금은 다만 그녀의 아리따운 모양을 삼키고자 하는 속마음은 나타내지 않고 그녀를 위하여, 아니 그녀의 결심과 그녀가 하려는 사명을 위하여 조력하고 있는 무리가 날로 늘어 간다 한다.

 

과연 연홍의 장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이며 그의 목적한 바의 사업이 성취될지?
또한 국제적 음모와 민족적 갈등이 많은 험악한 상해에서 한 떨기 고운 꽃이 끝끝내 열매를 맺고 조국강산에 발을 디딜까?
오직 이것은 운명이라는 험상궂은 그것에 달려있을 것이다.

 

아! 당대의 평양 명기!

【조선중앙일보 1933.08.09】

– 구곡(九曲): 구곡간장(九曲肝腸)의 준말. 굽이굽이 서린 창자라는 뜻으로, 깊은 마음속 또는 시름이 쌓인 마음속
– 엄연(儼然): 언행이 의젓하고 점잖은 모습
– 일구월심(日久月深): 세월이 흐를수록 더함
– 화용(花容): 꽃처럼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
– 명미(明眉): 아름다운 눈썹
– 입술(舌):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기사에서 혀(舌)를 입술이라고 썼다.


워낙 유명한 기생이어서인지 유흥계를 공개적으로 떠난 이후에도 장연홍의 행적을 다루는 기사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후에 나타난 장연홍의 행적


● 잡지 ‘별건곤’에 등장한 장연홍

상해는 세계 각 국민이 죄다 모여든 인조 전람회의 도시요, 육혈포와 칼과 주먹이 난무하며 주야 불구 싸움과 음모가 벌어지고 있는 무서운 도시이다.

 

한편으로는 상해가 항구요, 항구 치고 여자 없는 곳이 없는 만큼 상해는 가지각색의 매음부, 그 매음부의 상대인 문자 그대로의 성욕의 남성- 뭇 사나이들과 계집의 음행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이러한 상해 그곳에서 무엇을 찾겠다고 연홍은 갔으며, 찾을 것이 있다 쳐도 그는 자기의 소기한 것을 얼마쯤이나 도달하고 돌아올 것인가?

 

상해와 장연홍. 그것은 서로 모순이면서도 한편 잘 부합되는 명사와 명사이다. 상해와 장연홍이가 어떠한 방법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우리의 앞에 나타날지 하여간 우리는 사랑스러운 연홍의 귀여운 포부를 생각하여 악의 없이 웃으며 그 달성을 위하여 빌며 붓을 놓는다. 3
▲ 한복을 입은 장연홍


그가 유명한 장연홍이니만큼 그의 뜻의 성불성을 가릴 것 없이 우리는 그의 소식을 대단한 흥미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상해와 장연홍. 그것은 서로 모순이면서도 한편 잘 부합되는 명사와 명사이다. 상해와 장연홍이가 어떠한 방법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우리의 앞에 나타날지 하여간 우리는 사랑스러운 연홍의 귀여운 포부를 생각하여 악의 없이 웃으며 그 달성을 위하여 빌며 붓을 놓는다.

☞ 주) “이야기꺼리, 女人群像”, 【별건곤 제66호, 1933.09.01】


● 잡지 삼천리에 등장한 장연홍

재작년까지 평양 아니 전 조선에 명기(名妓)로 이름을 날리던 장연홍(張蓮紅) 박영도(朴英道)는 갑자기 상해(上海)로 건너가더니 박영도는 지난겨울엔가 자살을 해버렸다고 한다.

그들이 상해로 간다고 우리는 그다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무슨 기대할 것이 못된다는 것은 다시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박은 정말 가치 없는 죽음을 했다. 듣건대 조선에서는 몇 꼽을 수 없는 호남자(?) 정X택(鄭X鐸)한테 실연을 당하고 자살했다고 한다.

하필 죽으려면 먼 상해까지 안 가더라도 평양에도 죽을 장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물론 죽음 내면에 얼크러진 사정이 복잡하겠지만 하여간 칭찬할 행동은 못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남아 있는 장연홍은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

상해와 장연홍. 그것은 서로 모순이면서도 한편 잘 부합되는 명사와 명사이다. 상해와 장연홍이가 어떠한 방법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우리의 앞에 나타날지 하여간 우리는 사랑스러운 연홍의 귀여운 포부를 생각하여 악의 없이 웃으며 그 달성을 위하여 빌며 붓을 놓는다. 5
▲ 수영복을 입은 장연홍 엽서


재양(在壤) 당시 연홍은 애수(哀愁)의 미인(美人)이니 가을의 미인이니 「뱀프」의 눈이니 하고 그의 독특한 미모의 칭찬을 한 몸에 모았었지만 상해에서의 소식은 자세하지 못하다. 듣건대 그는 얼마 전에 무슨 사건으로 영사관에 붙들려 갔다고 하나 그것이 XX 어떠한 사건인지 정체를 알 수 없다.

 

그러면 이들은 기생으로서의 낙오(落伍)가 아니고 비약(飛躍) 인지도 모른다. 결과에 있어서, 박영도와 같은 행동을 취하지 말기를 바란다.

 

하여간 장연홍이나 박영도는 이삼 년 전까지 기성권번에서 일인자였지만 제일선에서 섰다고 함이 정당할까? 기생 생활에 권태(倦怠)를 느낀 모양이다. 하기는 기성권번이 조합제(組合制)에서 주식제(株式制)로 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다가 탈퇴해 버린 원인도 있겠지만…

☞ 주) 金山月, “古都의 絶代名妓, 主로 平壤妓生을 中心삼고”, 【삼천리 제6권 제7호, 1934.06.01】


위의 두 자료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1. 당시의 상해는 기생출신 여성이 학업을 하거나 조용히 살기엔 힘든 곳이었다는 점.
2. 다른 기생과 함께 갔다는 것은 기생의 삶을 벗어나려는 것보다는 함께 사업을 하려는 모습에 가깝다는 점.

 

장연홍과의 3편의 인터뷰는 그녀의 입장에서 호의적으로 쓰여졌지만, 다른 기자들은 중국행을 상당히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다. 당시의 상하이는 유명한 명기들이 모여든 기방이 많은 환락의 도시였고, 조선귀족 민영찬의 일화에서도 보듯이 부자들이 첩들과 함께 조선을 떠나 살림을 차리는 곳이기도 했던 것이다.

 

– 관련 글: 중국인 첩에게 배신당한 민영찬

 

결국 기성권번과의 트러블이 생겨 탈퇴한 장연홍은 상해로 떠나 그곳에서 동료와 화류계 생활을 이어갔거나 요리점 같은 것을 했을 확률이 커 보인다. 하지만 함께 간 동료 박영도가 실연을 하고 자살한 것으로 봐선 그마저도 잘 풀리진 않은 모양이다.

 

동명이인(?), 해방 후 장연홍


상해와 장연홍. 그것은 서로 모순이면서도 한편 잘 부합되는 명사와 명사이다. 상해와 장연홍이가 어떠한 방법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우리의 앞에 나타날지 하여간 우리는 사랑스러운 연홍의 귀여운 포부를 생각하여 악의 없이 웃으며 그 달성을 위하여 빌며 붓을 놓는다. 7

▲ 육미장 경영주 ‘張蓮紅’ 【평화일보 1948.09.11】


1948년 평화일보와 1949년 연합신문에 등장한
‘육미장(六美莊)’이라는 이름의 조선요리 전문점 광고 내용 중, 여성 이름으로 추정되는 경영주 중에서 장연홍(張蓮紅)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상해와 장연홍. 그것은 서로 모순이면서도 한편 잘 부합되는 명사와 명사이다. 상해와 장연홍이가 어떠한 방법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우리의 앞에 나타날지 하여간 우리는 사랑스러운 연홍의 귀여운 포부를 생각하여 악의 없이 웃으며 그 달성을 위하여 빌며 붓을 놓는다. 9
▲ 미인접대부를 강조한 육미장 광고【연합신문, 1949.02.12】


물론 동명이인임을 간과할 수 없겠지만 ‘6인의 미인(六美)이라는 의미로 보이는 요리점 이름과 6인의 여성 경영주, 「미인 접대부(接待婦)의 명랑(明朗)한 서비스」라는 문구로 아마도 전직 기생들일 여성들이 의기투합해서 설립한 곳임을 추정할 수 있다.

 

육미장은 1950년 4월 이후 「장안 월궁 선녀(長安月宮仙女) 수십 명이 접대한다는 대원정(大圓亭)」이라는 상호로 변경하였다.

 

상해와 장연홍. 그것은 서로 모순이면서도 한편 잘 부합되는 명사와 명사이다. 상해와 장연홍이가 어떠한 방법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우리의 앞에 나타날지 하여간 우리는 사랑스러운 연홍의 귀여운 포부를 생각하여 악의 없이 웃으며 그 달성을 위하여 빌며 붓을 놓는다. 11
▲ 현재의 서울 종로구 관철동 248 모습


사업이든 유학이든 상하이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장연홍은 대다수의 조선인들처럼 중일전쟁(1937~1945)발발과 함께 귀국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해방이후 기생 동료들과 함께 요리점을 개업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한국전쟁때 고향인 평양으로 갔다면, 동란에서 살아남았더라도 더 이상 장연홍의 이름이나 행적은 세간에 떠도는 일 없이 조용히 사그라져 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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