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장인환(張仁煥)의 33세 연하 신부
독립운동가 장인환(張仁煥, 1876~1930)은 미국의 외교관 더럼 스티븐스(Durham Stevens, 1851~1908)가 대한제국을 멸시하는 발언을 하자 그에 격분해 암살을 실행한 인물이다.
이 사건으로 장인환은 2급 살인죄를 선고받고 미국에서 10년을 복역하였다. 이후 1927년 고국에서 고아원 사업을 하고자 귀국하였는데, 이때 그의 자선사업계획에 감복한 평양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생인 윤치복(尹致福)이라는 여성과 결혼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 18세 묘령신부와 50세의 노신랑
– 옛날 미국인 스티븐슨 살해 미수한 평양 장인환이가 근일에 화촉 성전
– 사회봉사로 고아원
20년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인 스티븐스를 살해 미수한 사실로 그곳에서 15년 동안 철창 생활을 하다가 20년 되는 지난 4월 19일에 자기의 본적지인 평양부외 선교리에 돌아온 장인환(50)은 지난날 자기의 생활을 돌아보며 얼마 남지 아니한 장래를 사회봉사에 바치고자 하여 있던 토지를 팔아 그 돈으로 평안북도 선천에 고아원을 경영하기로 하고, 목하 모든 준비를 착착 진행 중인 바 이하 소문이 부근 각지에 전차되어 일종 이야깃거리가 되었는데, 이 소문을 들은 평양숭인여학교 금년도 졸업생 윤치복(18)양이 그에게 결혼을 청하였으므로 장씨는 이를 쾌락하여 불원간 화촉의 성전을 거행할 터이라 한다. 윤양은 결혼 후 남편을 도와 고아원 경영에 힘을 쓸터라더라. 【매일신보 1927.06.01】
몇몇 자료에는 ’51세 여성’이라고 되어있지만 위 매일신보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고등학교 재학 중인 여성이었으므로 이는 오류다. 당시 장인환이 51세, 윤치복은 18세였고, 언론은 이에 대해 ‘노신랑 소신부(老新郎少新婦)’라는 수식어로 다루고 있었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장인환은 평북 선천에 대동 고아원을 설립하고 그의 뜻에 감복한 재외동포들의 모금을 받아 귀국 전 고아원 사업을 크게 확장하다가 귀국하여 윤치복을 소개받고 결혼식을 올렸다.
– 노신랑 소신부
– 장인환 씨 결혼
수개월 전에 미국에서 귀국한 장인환 씨와 평양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인 윤치복 양과의 결혼식을 10일 하오 3시에 부내 남산현 예배당에서 오기선 목사의 주례 하에 거행하였다더라. 【동아일보 1927.06.11】
▲ 윤치복, 장인환
기사가 난 열흘 후,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으나 부부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인환은 일제시대 전에 미국으로 떠났기에 변화된 고국에 적응도 어려웠던 것 같고, 오래 연애한 사이도 아닌 갑작스레 소개받은 손녀뻘 여성과 대화가 통하지도 않았을 테니 가정이 그의 쉼터가 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불과 4개월 후인 10월 11일, 장인환은 신부 윤치복을 남겨두고 미국으로 떠난 후 지병으로 고통받다가 1930년 5월 21일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