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기록사진
이란-이라크 전쟁(Iran–Iraq War)은 1980년 9월 22일에 발발해 1988년 8월 20일까지 일어난 전쟁이다.
무려 8년을 끈 전쟁으로 양국은 이란군이 약 20만~60만 명 사망, 이라크군이 10만 5천~50만 명이 사망했다. 또한 민간인 사망자도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수많은 고아들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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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은 휴전이라는 형태로 끝나면서 양국 간 배상도 없었고, 국경도 전쟁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긴 전쟁의 결과로 이란의 수도 테헤란은 도시 곳곳에 전사자들의 이름을 붙이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묘비‘라는 별명이 붙었고, 이라크는 이 전쟁에 이어 걸프전쟁 등 계속되는 참화로 나자프(najaf)의 와디 알-살람(Wadi al-Salaam) 묘지는 확장 끝에 ‘세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에 등극했다.
▲ 이라크 남동부 메이산(Maysan) 주에 방열한 이라크 포병대대가 포사격을 실시하는 모습. 이란과 국경을 접한 최전방이다.
▲ 이란 남서부 후제스탄 주의 호람샤르(Khorramshahr)로 진격한 이라크 기갑부대.
▲ 호람샤르에서 환호하는 이라크 군인들. 호람샤르는 이란-이라크 전쟁의 최대 격전지로 전쟁 중 수차례 뺏고 뺏기는 과정을 반복했다.
▲ 이란은 혁명 과정에서 팔라비 왕조에 충성하는 군 장교들을 대거 숙청하였고, 이로 인해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 틈을 타 이라크는 전쟁 초반 이란의 국경도시를 전격전으로 함락시켰다.
▲ 휴식을 취하던 이라크 군인들이 카메라를 향해 환호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폭약과 포탄을 옮기는 이라크 군인.
▲ 호람샤르를 점령한 이라크 군이 전초기지의 초소에 있는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0~1989)의 초상화를 능욕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 루홀라 호메이니는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이란 국민들의 영적 지도자 반열에 올라섰다. 전쟁이 발발하자 국민투표를 통해 그는 이란 군사 최고지도자로 추대되면서 ‘신의 명령’으로 국민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 포격으로 불타는 이란의 정유공장.
▲ 이라크 포병대대 지휘소가 이란 후제스탄 주의 아바단(Abadan)과 호람샤르(Khorramshahr)에 대한 포격 위치를 조정하고 있다.
▲ 이라크 국경과 가까운 이란 케르만샤 주 사르폴 자하브(Sarpol Zahab)에서 이라크 군의 포격으로 사망한 동료의 시신 옆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란 혁명수비대 소속 군인.
▲ 이라크의 공세에 대비하는 샤트알아랍 강(Shatt al-Arab River)에 배치된 이란 방공포병.
이란은 숙청되었던 공군 장교들이 사면되고 군에 복귀해 제공권을 장악하면서 반격의 기틀을 마련했고, 이는 이란의 패배를 막았지만 전쟁이 길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 이란 케스레쉬린(Qasr-e Shirin) 인근에서 포격으로 전소된 이라크 트럭 앞에서 총을 들고 환호하는 이란 혁명 수비대 군인.
▲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2006)의 초상화를 군용 트럭의 문에 붙여놓은 이라크 군인들이 최전방 아바즈(Ahvaz)에서 바스라(Basra)로 복귀하고 있다.
▲ 이란군의 포격으로 이라크 바그다드 발전소의 연료유 창고에 화재가 발생하자 소방차가 진압을 하는 모습.
▲ 바그다드 발전소 연료유 창고에 발생한 화재를 이라크 소방관이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다.
▲ 아바즈(Ahvaz)의 이란 군사기지에 억류된 이라크군 포로들. 수니파 이슬람 성직자인 물라(Mullah)가 포로들을 방문하고 있다.
▲ 호메이니를 지지하는 시아파 이라크인들이 이라크를 탈출해 이란으로 망명하는 모습.
이란은 이슬람 시아파의 맹주국가로 99.4%의 무슬림 인구 중 약 90~95%가 시아파이고, 이라크는 95%의 무슬림 인구 중 64~69%가 시아파, 29~34%가 수니파로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당시의 이라크는 수니파 왕정국가들의 후원을 받으며 수니파 무슬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