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제국, 다리우스 대왕의 집권과 정치철학
인류 최대의 문화유산을 이룩한 고대 페르시아는 예술적, 문화적 업적뿐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에서도 인류사에서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세계 인권의 아버지이자 자애롭고 관대한 왕 키루스(Cyrus) 대왕을 비롯하여 크세르크세스 대왕으로 이어지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전성기는 진정한 지도자의 길과 현명한 정치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계몽의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약 2,500년 전 인류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했던 페르시아 전성기의 최정점 다리우스 대왕(Darius the Great)의 집권과정을 알아보는 것으로 유구한 페르시아 역사를 알아보도록 하자.
▲ 다리우스대왕 치하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아우르던 페르시아제국의 영토
기원전 550년, 페르시아인들의 본고장인 파르사 지방의 유력자 히스타스페스의 장남으로 태어난 다리우스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창건자 키루스 대제와 2대 왕 캄비세스 2세(Cambyses)에게 대를 이어 충성하던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다리우스가 이집트 원정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떨치던 즈음 페르시아에서는 캄비세스 2세가 사망하고 동생 바르디아가 즉위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바르디아의 정체는 곧 왕비에 의해 발각되는데, 알몸이 된 바르디아를 침실에서 보니 귀가 없는 것이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왕비는 페르시아의 명문가의 대표 격이자 대신인 아버지 오타네스(Otanes)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무엇이! 왕의 귀가 없다고?”
이 사건의 진실의 내막은 다음과 같다.
바르디아는 선왕 캄비세스 2세에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 바르디아는 사실 캄비세스 2세에게 이미 반역죄로 죽음을 당한 상태였고, 자신을 바르디아라고 자칭하며 왕위를 찬탈한 자는 키루스 대왕에게 죄를 지어 귀가 잘리는 형벌을 받았던 제사장 가우마타였던 것이다.
왕위에 오른 바르디아도 일종의 쿠데타로 집권하여 정통성이 의심받는 와중에, 그마저도 사칭이었던 셈. 이에 오타네스는 비밀리에 페르시아 귀족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7명의 대신으로 구성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즉각 가짜 바르디아인 가우마타를 제거하고 페르시아의 정통을 회복한다는 명분 하에 군사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다리우스는 귀족위원회의 주력이었으며 그의 지휘 하에 가우마타군과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다리우스의 활약에 힘입어 결국 가우마타는 메디아(Medea)로 도피하였으나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진다.
난국을 수습한 7인의 선제후 오타네스, 다리우스, 메가바조스, 인트라프레네스, 고브리아스, 히다르네스, 아스타피네스는 향후 페르시아의 정국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고 정치체제를 어떻게 개편해야 되는가에 대한 중차대한 회의를 갖게 된다. 7인 회의에서 대신들은 앞으로 페르시아를 이끌 정치제도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 시작하였다.
– 오타네스는 민주주주의를 주장하였다.
“독재정치는 지양되어야 한다. 권력은 분산되어야 하며, 권력자 한 사람의 결정에 의해 모든 것이 좌지우지되면서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체제는 합리적이지 못하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키루스 대왕의 유지를 되살려 인민과 대중의 뜻에 따라 정책을 펼치고 그들의 권리를 강화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 메가바조스(Megabazos)는 이에 반대하며 과두정치를 주장하였다.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는 것은 좋으나 그 권력이 약해져서도 안된다. 지도자들의 연립정권으로 권력의 과도한 집중과 지나친 분산을 막아야 하고 이에 최적화된 정치형태는 과두정치밖에 없다.”
라고 주장하며 선제후 간 토론이 과열되는 양상으로 흐르고 있었다.
– 그때 침묵을 지키던 다리우스가 나섰다.
“아니 된다. 대중은 우매하며 실체가 없다. 결코 대중에게 권력이 가서는 안된다. 권력을 줘도 고마워할 줄 모르는 것이 대중의 속성이다. 그들은 얄팍한 감성과 조잡한 선동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존재다.”
“우리 페르시아는 사면이 적으로 둘러싸인 극히 개방적인 지형의 국토를 지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 민주주의는 혼란과 분열만을 가져올 것이다. 대중 누구에게나 권력이 분산되면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은 무슨 힘으로 지켜낸다는 말인가. 가장 뛰어나고 현명한 지도자 주의의 정치만이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여 선대에 이은 강력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다. 부국강병과 강력한 제국은 뛰어난 지도자와 신민들의 복종에서 나오는 것이다.”
“과두정치 또한 결국 당파싸움과 진영 간 대립으로 국력의 불필요한 누수를 가져올 뿐 아니라 최종적으로 승리한 당파에 의해 권력이 집중될 터인데 그런 예정된 시행착오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민주정치와 과두정치 모두를 공격한 다리우스의 일갈에 치열한 논쟁은 종결되고 마침내 투표에 의해 정치체제를 선택하는 방향으로 토론이 마무리되었다. 결국 4대 3 한표 차이로 다리우스의 의견이 채택되어 페르시아는 지도자 독재정치를 채택하게 되었다.
오타네스는 자신은 지도자가 될 생각이 없고, 향후 지도자가 나오게 되면 자신과 가문의 독립성을 존중하기를 원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에 남은 선제후들은 최종 지도자 선출에 앞서 다음과 같은 조항을 합의하였다.
1. 미래의 지도자는 오타네스가문을 지배할 수 없고, 매년 상을 내려 품위를 유지시킬 것.
2. 여섯 명의 제후들은 사전 예약 없이 황궁에 출입할 수 있으나, 왕이 여자와 동침일 시는 예외로 한다.
3. 미래의 지도자는 선제후 가문에서 왕비를 간택한다.
이 같은 조약에 합의한 후 제후들은 지도자 선출방식을 논의하였다. 결국 지도자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으고, 청명한 새벽에 각자 말을 타고 가장 먼저 큰소리로 우는 말의 주인을 왕으로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는 우리가 이미 역사를 통해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3대 왕의 자리는 다리우스에게 돌아갔다. 다리우스의 말이 가장 먼저 크게 울부짖었던 것이다. 사실은 다리우스 대왕의 마부가 발정기인 암말의 음부를 미리 만져 냄새를 배게 한 후 여섯 제후가 도열한 가운데 다리우스의 말의 코에 손을 갖다 대었기 때문이었다.
▲ 신하를 접견하는 다리우스 대왕의 집무 모습
다리우스 대왕의 집권과 업적은 이란 서북부 베히스툰산에 조각된 비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왕위 찬탈자 가우마타를 정벌하고 집권에 이르는 과정 또한 기술되어 있다. 이 베히스툰 비문에는 집권 과정에서 자칫 정통성에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상기 비화를 당당히 적어놓는 대왕의 자신감 넘치는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히스타스페스의 아들 다리우스, 말과 마부의 공으로 페르시아 왕위에 오르다.”
실제로 다리우스 대왕 집권 초기 2년간은 가우마타 잔당들과 왕 선발방식에 반발한 제후의 반란을 처리하며 왕권을 강화하는데 주력하게 된다. 내부의 반란세력과 폭도를 정벌한 다리우스 대왕은 이제 주변 국가와 민족들을 점령하면서 페르시아 제국을 당대 최강대국의 위치에 올려놓게 된다.
▲ 반란진압을 기록한 베히스툰 비문의 부조
“부드러운 땅에서는 부드러운 남자들이 태어나는 법. 훌륭한 양식과 용감한 전사들이 같은 땅에서 태어나기란 불가능하다. 평야를 경작하며 남의 노예가 되느니 척박한 땅에서 살기를 택한다.”
– 아케메네스 왕조의 격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