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연탄가스 제독제 광고
연탄의 등장
1950년대 후반부터 한국 각 가정의 난방연료로 등장하기 시작한 ‘연탄‘은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연탄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겨울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장작 패는 소리로 요란스러웠고, 신탄상(薪炭商)이라고 불리는 장작과 숯을 파는 상인이 거주지를 돌아다니며 땔감을 사라고 외치는 풍경이 일상이었다. 또 신탄장에 상주하는 도끼꾼들은 통나무를 사가는 사람을 따라가서 장작을 패주고 품삯을 받았다.
▲ 1960년, 청량리 신탄장(薪炭場)
하지만 장작의 가격은 고정적이지 않아서 수급상황에 따라 쌀 한가마보다 장작 *한평(坪)의 가격이 높기도 하였으며, 낮은 효율에 더해 불을 피우는데도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고 무분별한 벌채로 인해 민둥산을 만드는 주범이었다.
즉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정해진 시간마다 새 연탄을 갈아주는 작업이 불편해 보이지만, 화력을 유지하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수시로 아궁이를 확인해야 하는 장작보다는 훨씬 간편했다. 이 때문에 연탄은 그 등장으로 ‘주부들의 일이 매우 쉬워졌다‘라는 찬사를 받았을 정도로 삶의 질을 엄청나게 상승시킨 원료였다.
*당시 장작 묶음의 단위는 평(坪)이었다.
1평(坪) = 세로 2척 3촌 x 가로 6척 x 높이 6척
1촌(寸) = 3.0303cm
1척(尺) = 30.30cm
겨울의 사신, 연탄가스
이처럼 겨울을 따뜻하게 해주는 고마운 연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연탄가스(일산화탄소) 중독으로 겪는 사고가 급증하면서 ‘겨울의 사신(死神)’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도 들러붙었다.
아래는 1976년에 발행된 연탄가스 제독제 광고로 ‘무서운 연탄까스로부터 당신의 귀중한 생명을 보호합시다‘라는 섬뜩한 문구가 붙어있다.
▲ 연탄가스 제독제 ‘까스완’
연탄이 난방 원료의 주류로 자리 잡고 있는 동안 겨울철에는 연탄가스중독으로 사망했다는 뉴스는 매일 끊이지 않았다.
당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의 발표에 따르면, 1975년에 전국에서 81만 명이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이중 11만 명이 입원하고 5천 명이 사망했다. 같은 해 전국의 교통사고가 5만 8천 건이 발생해 3천 8백 명이 사망한 수치와 비교해 보면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듬해 연탄가스중독사고는 더욱 심각해졌다. 1976년 12월 21일, 서울시 당국이 10월부터 집계한 연탄가스사고 건수는 805건 발생에 829명이 사망하였는데, 이는 1975년 같은 기간의 454건 발생, 517명 사망보다 훨씬 늘어났다.
▲ 1970년대의 연탄가스 중독사고
사고 급증의 원인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급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1976년의 겨울철 날씨는 갑자기 추웠다가 따뜻해지는 등 변덕이 심했다. 당시 연탄아궁이가 있는 부엌에서 방으로 직접 통하는 문이 있는 구조의 집이 많았는데, 사고가 많은 날은 주로 바람이 없고 포근한 날로 연탄가스는 기온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올 때 굴뚝으로 잘 빠지지 않고 아궁이나 방의 틈으로 새어 나오는 경우가 발생했다.
▲ 응급환자를 대상으로 고압산소기 치료를 하는 모습. 고압산소기가 있는 종합병원은 서울 18개, 지방 6개 병원에 설치되어 있었다.
또 하나의 원인은 저질탄이었다. 당시 삼표, 정원, 경홍 등의 3개 회사가 서울시 연탄 일일소비량의 절반을 공급하였는데, 이들이 질 좋은 원탄 대신 열량이 낮은 저질원탄을 비수기인 여름이 오기 전에 소비하기 위해 저질탄을 생산하면서 경고를 받기도 했다.
연탄가스는 연탄을 갈고 한두 시간 내에 가장 많이 발생하는데, 저질탄은 불이 금방 꺼져서 자주 연탄을 갈아주어야 했고 사고의 위험성은 높아졌다.
▲ 입과 코를 막고 연탄을 가는 주부. 연탄은 처음 불이 붙을 때 가스가 많이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에너지 절감을 이유로 종전 4kg이었던 연탄을 1975년에 3.6kg으로 줄인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정부가 연탄의 크기를 줄일 때에는 열량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는 시험결과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12~13시간이었던 연소시간이 7~8시간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연탄의 구멍이 19개에서 22개가 되면서 타는 속도가 매우 빨라진 것이었다.
게다가 실험실 환경과는 달리 대부분의 가정은 19공탄의 크기에 맞는 화덕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덕 가장자리에 남는 공간이 생겨 바람이 통하면서 연탄은 더욱 빨리 연소한 것이다. 즉 하룻밤에 2회만 연탄을 갈면 되었던 것을 3~4번 갈아야 했는데, 그로 인해 잠을 설치는 것은 물론이고 가스중독 위험성까지 높아져 버린 것이었다.
▲ 삼천리그룹에서 생산한 22공탄
연탄은 장작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과 편리한 사용성, 높은 효율로 사랑을 받았지만 연탄가스 중독사고의 결과는 끔찍했다.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한방에 모여서 자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가스가 유출되면 일가족이 함께 참변을 겪거나 시골에서 올라온 친척까지 몰살하는 사례가 즐비했다.
명과 암이 함께 존재했던 연탄아궁이의 점유율은 1986년이 되자 17.4%까지 줄어들었고 연탄보일러가 46.7%로 그 자리를 대체했다. 이후 연료 현대화정책 추진과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석유 및 도시가스의 수요가 크게 늘면서 연탄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 1986년, 주택형태별 에너지 소비구조 (에너지경제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