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돈 1원에 철거된 한일은행 옛 본점
한일은행은 1932년 ‘조선신탁주식회사(朝鮮信託株式會社)’로 설립하여 해방 후 조선신탁은행(1946년), 한국신탁은행(1950년)을 거쳐 1954년 10월에는 한국상공은행과 합병하면서 한국흥업은행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이후 1958년에 정부지분을 공매하고 민영화하면서 행명을 한일은행으로 변경하였다(1960년 이후 다시 국영화). 아래의 사진은 1960년대 한일은행 옛 본점의 모습이다.
‘오늘없이 내일없고 저축없이 번영없다‘라고 적힌 표어간판이 건물 옥상에 있고, 정문에는 ‘한일은행’이라는 상호와 그 위에는 초창기의 로고가 보인다.
▲ 한일은행 로고(1960~1980)
이 건물은 원래 조선신탁주식회사 설립 이후 1937년 10월, 본사 신사옥으로 건축되었다. 설립부터 해방까지 회장을 맡았던 인물은 일제시대 거물 금융인이었던 한상룡(韓相龍, 1880~1947)이었다.
건물의 공사비는 30만 원. 1937년 은행 출납계 직원의 월급이 60원 정도이니 이를 100~200만 원 정도로 환산하면 오늘날 가치로 공사비 50~100억 정도가 소요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1938년, 조선신탁주식회사 본사 ⓒ 躍進朝鮮大觀
당시 공사장 인부는 중국인들이 많았는데 중일전쟁(1937~1945)이 발발하여 이들이 대거 귀국길에 오르면서 완공이 예정보다 늦춰지는 곤란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 조선신탁주식회사 신축본사 모형
철근콘크리트에 인조대리석으로 단장한 고딕 양식의 건물은 명동과 소공동 일대에 고층건물이 별로 없었던 시절, 아름다운 현대건축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단돈 1원에 철거된 한일은행 옛 본점
1960년대 중반부터 한일은행은 본점을 철거하고 신축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재무부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30여 년밖에 되지 않은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라 노후화 때문은 아니었다. 당시 건물의 규모는 작지만 1937년에 설치된 엘리베이터와 난방이 고장도 없이 멀쩡했고 벽에는 금 간 곳 하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건축전문가들이 그 시점에서 최소 80년 이상의 수명을 장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남겨두었다면 지금도 어떤 형태로든 사용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 1968년, 한일은행 옛 본점
하지만 대지면적 1200평에 연건평 1394평. 숫자 그대로 넓은 땅에 협소한 건평으로 금싸라기 땅을 낭비하는 형태였다. 건축 당시에는 10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할 것을 계획하고 지은 건물이었지만, 1968년에는 무려 650명이 빽빽하게 근무를 하고 있었다.
즉 날로 커지는 대형은행의 본점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1977년, 한일은행은 남대문로 확장공사와 함께 뒤편에 있는 경남은행 건물까지 사들여 대지면적을 1500평으로 확장하고 신축을 결정하였다.
▲ 한일은행 적금광고 【부산일보 1966.03.25.】
이에 9월 3일 공개입찰이 실시되었는데, 입찰에 응한 17개 건설사 중 도급순위 양대산맥이었던 현대건설과 대림산업이 각각 1원에 응찰하며 논란이 일었다. 한일은행 신축본부 측 예상에 따르면 대략 5천만 원이 들것으로 예상되는 공사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현대와 대림 측은 “철거비용이 약 4천만 원 정도인데, 철거 시에 나오는 철근과 자재의 재판매 가격이 4천만 원 정도 될 것으로 예상되어 1원에 응찰했다”라고 주장했다.
▲ 한국통화 최저단위 1원 주화
하지만 다른 업체들은 “신축건물 공사를 맡는 것까지 겨냥한 것 아니겠느냐“며 토건업계의 암묵적인 규율을 위반한 두 업체를 격렬히 비난했다. 이에 한일은행 측은 “정부 공사인만큼 철거공사와 신축공사 사이의 연고권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해명을 내놓았으며 “40년 전에 지은 건물의 자재가 얼마나 회수되겠느냐”며 반문했다.
숱한 의혹 속에 9월 5일 두 업체를 놓고 추첨이 실시되었고, 대림산업이 철거 시공사로 최종 낙찰되었다.
▲ 1977년, 철거직전의 한일은행 옛 본점
그리고 이듬해인 1978년 2월 15일, 문제의 본점 신축공사의 제한경쟁입찰이 대림, 동아, 현대, 극동, 삼환, 삼부, 남광토건의 7개 사가 참가한 가운데 시행되었다. 결과는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철거공사를 맡았던 대림산업이 삼부토건보다 200만 원이 낮은 8억 1400만 원을 적어내면서 낙찰의 행운을 안았다.
이 신축공사는 1차 공사인 지하와 골조공사에 국한된 것이었으나 나머지 공사를 별개의 건축업체에 따로 맡길 리가 없기 때문에 실제 공사비는 100억 이상으로 추산되는 대형사업이었다. 게다가 철근과 철골 등의 자재를 한일은행 측이 구입하는 계약으로, 실제 대림산업이 부담하는 것은 총공사비의 40% 정도인 대단한 혜택을 받는 사업이었다.
▲ 신축된 한일은행 본점
신축건물은 1981년 8월 26일, 지상 20층 지하 5층으로 완공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한일은행은 민영화되었는데 놀랍게도 시공사인 대림산업이 한일은행의 최대주주가 되면서 기묘한 ‘단돈 1원 철거공사‘는 결과적으로 대림산업이 철거하고 신축한 다음 입주까지 하는 형국이 되었다.
▲ 1998년, 한일-상업은행 합병선언
이후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상업은행과 합병하여 ‘한빛은행‘으로 출범(1999년)하면서 한일은행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어 2002년에는 다시 ‘우리은행‘으로 행명을 변경하였고, 그해 9월에 본사건물을 롯데백화점에 매각하며 은행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 서울 중구 남대문로 롯데백화점 에비뉴엘 본점 (2022년 7월)
현재 이 건물은 2005년 3월, 롯데백화점의 명품관인 에비뉴엘 본점으로 개관하여 새로운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