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오일쇼크에서 비롯된 일본의 ‘화장지 소동’
1973년 11월 2일, 일본 각지의 슈퍼마켓에 주부들이 몰려들어 화장지가 품절되는 이상사태가 발생했다. 이를 ‘1973년의 화장지 소동‘이라 부른다.
당시 일본은 고도성장기로 전후 부흥을 달성하고 경제대국의 주춧돌을 쌓고 있던 시점이었다. 바로 이때 제 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이 발발하였다. 1973년 10월 16일, 중동의 산유국들은 원유가격을 일제히 70%씩 인상하였다. 이른바 ‘오일 쇼크’
중동으로부터 원유수입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전체 에너지의 80%를 석유에 의존하던 일본은 큰 타격을 입었다. 석유화학제품의 가격은 30%가 인상되었고, 10월 19일에 나카소네 야스히로 통상산업성 장관은 ‘종이를 아껴쓰자’라는 구호를 발표하며 국민들에게 절약을 호소하였다.
일본국민들은 ‘인상’과 ‘물자부족’이라는 단어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소동의 시작
‘화장지 소동’의 발단은 사소했다.
소동이 발발하기 며칠 전부터 시중에는 화장지 부족의 루머가 떠돌고 있는 상태였다. 11월 1일 오후 1시 30분경, 오사카의 치사토 다이마루 플라자(千里大丸プラザ)는 판매전단지에 ‘화장지 매진임박!’ 이라고 쓰며 폭탄세일을 시작했다. 지금도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호객행위였을 뿐이었다.
▲ 소동이 발생했던 치사토 다이마루 플라자(현 피코쿠 스토어)
300여 명의 주부가 줄을 선지 2시간 만에 세일품목이었던 500개의 화장지가 매진되었다. 구입에 실패한 주부들이 불같이 항의하자 세일품목이 아닌 화장지까지 판매를 시작했지만 금새 동이 날 정도였다.
▲ 몰려든 일본 주부들
알뜰한 주부들이 몰려든 단순한 해프닝을 소문을 들은 신문사가 기사화하며 소동이 시작된다. 진실을 전해야 할 언론사가 ‘순식간에 화장지 가격이 2배로 올랐다’라며 과장된 보도를 하였고, 이것을 신호탄으로 전국 각지에 ‘화장지가 곧 바닥난다’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 박스를 개봉하자마자 판매완료
소문에 흔들린 소비자들 덕분에 전국의 매장에서 화장지가 거덜이 났지만 뜬소문이었고, 실제로는 일본의 화장지 생산은 매우 안정적인 상태였다. 오히려 공황이 발생하자 화장지의 생산량을 증가시킬 정도였다.
▲ 경찰이 출동해 과열을 진정시키고 있다
하지만 한번 불붙은 공황은 가라앉지 않았다. 경찰이 출동할 정도의 폭동사태가 나오는가 하면, 화장지의 가격이 반나절사이에 140엔에서 400엔으로 폭등하기도 했다. 가격의 폭등에도 아랑곳없이 화장지를 사재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 ‘이제 안심이 되네’. 사재기에 성공한 행복한 주부
일본 전국의 상점들은 화장지 재고확보에 주력해 도매상품의 재고조차 완전히 비워질 정도였다. 소동이 심화됨에 따라 시큰둥하던 사람들조차 화장지 구입에 나섰고, 백화점에서는 화장지 판매때마다 대혼잡이 발생해 매번 미아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 질서로 유명한 일본문화를 무색케하는 장면
전후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풍요로운 시대를 누리던 일본이었기에 전쟁 당시 겪었던 ‘물자부족의 공포’가 엄습한 것이었다.
화장지에서 비롯된 소동은 세제, 설탕, 간장등의 공황으로 이어지며 생필품의 가격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런 생필품 공황사태는 이듬해까지 이어졌고 3월이 되어서야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 상점문이 열리자마자 들어오는 주부들
1973년의 오일쇼크는 일본의 물가상승을 가속화시켰고, 가로등의 소등과 에스컬레이터 일부 운행 중지등의 풍경도 볼 수 있었다.
상승가도를 달리던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전후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하였다.하지만, 에너지 절약과 친환경 에너지 개발이 차근차근 진행되어 40여년이 지난 후 현재의 일본이 세계최고수준의 에너지 효율을 달성할 수 있는 순효과도 발생시킨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