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사진의 뒷이야기 ⑱ 전설적인 열기구 조종사
위풍당당한 열기구 조종사
출발 직전의 거대한 열기구에 바람을 집어넣고 있는 모습. 조종사로 추정되는 남자가 그 앞에 서 있다.
1904년, 열기구를 타고 네 번째 알프스 횡단비행에 나서는 에두아르트 스펠터리니(Eduard Spelterini, 1852~1931)가 스위스 융프라우 기슭의 아이거글레처역(Eigergletscher)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금은 생소한 이름이지만 에두아르트 스펠터리니는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열기구 조종사였다.
1877년 열기구 조종사 면허를 획득한 이래, 그는 리오나 데어(Leona Dare, 1855~1922)라는 공중곡예사와의 협연으로 이름을 알렸고 1891년부터는 열기구 모험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 1888년, 런던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리오나 데어가 에두아르트의 열기구를 타고 곡예를 하는 모습
수많은 유럽 왕족들이 그와의 여행에 동행했고, 언론인을 태우고 험준한 산맥을 횡단하는가 하면, 과학자들을 태우고 높은 고도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나 기상학적 실험을 진행함으로써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뉴스거리를 생산해냈다.
특히 열기구에서 보는 광경은 평생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로써는 상상도 못 할 세계였다. 에두아르트는 이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을 생각을 했고 1898년, 역사상 최초로 알프스 산맥을 공중에서 찍은 사람이 되었다.
▲ 1904년 9월 20일, 열기구에서 촬영한 베르나 알펜 융프라우의 북벽
스스로를 ‘하늘의 왕‘이라고 칭할 정도로 잘 나가던 그의 하늘 여행은 예기치 않게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다. 전쟁으로 유럽 각국의 국경이 폐쇄되면서 강제은퇴를 해야 했던 것.
전쟁이 금세 끝나지 않고 몇 년간 지속되면서 에두아르트의 풍족했던 재산도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전후에는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그의 재정은 바닥을 치고 말았다.
▲ 1904년 11월 21일, 600m 상공에서 촬영한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
게다가 전쟁으로 인한 급속한 기술 발달로 순식간에 비행기가 자리 잡으면서 열기구의 시대는 완전히 종말을 앞두고 있었다.
엔진이 달린 항공기를 ‘시끄럽고 흔해빠진 천박한 것‘이라며 외면하던 에두아르트는 사람들로부터 점점 잊혀졌고, 그는 생활을 위해 놀이공원의 고정된 열기구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방문객들을 태우고 잠깐 오르내리는 체험을 시켜주는 일을 해야 했다.
▲ 1922년 6월 22일, 코펜하겐 티볼리 공원(Tivoli Gardens). 이곳에서 근무하던 시기에 촬영한 것이다.
떴다 하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에두아르트가 이런 단조로운 일을 좋아했을 리 없다. 그는 1926년 지인들에게 빌린 돈으로 열기구를 빌리고 사람들을 모아 취리히를 출발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의 나이 74세.
▲ 1890년대 중반, 200m 상공에서 촬영한 스위스 취리히
에두아르트는 ‘전설적인 열기구 조종사의 부활!‘이라는 언론의 헤드라인을 상상하고 있었겠지만 누구에게나 닥치는 세월이 그를 가로막았다.
오랜 세월 총 1,237명의 승객을 태우고 570여 편의 열기구 모험을 하는 동안 단 한 명의 부상자도 나오지 않았는데 정작 조종사인 그가 공중에서 실신해버리는 사고가 발생한 것. 다행히 승객들이 침착하게 대처해 착륙에 성공하면서 인명피해는 없었다.
▲ 1913년, 스위스 알프스의 라긴혼(Lagginhorn)을 촬영한 모습.
이로써 과거의 영광에 대한 에두아르트의 마지막 집착은 완전히 종말을 고했고, 대륙을 횡단하던 위풍당당한 열기구 조종사의 모습도 낡은 필름만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