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사진의 뒷이야기 ⑲ 1920년, 빈털터리 왕과 베테랑 거지
국왕과 거지
1920년 영국 국왕 조지 5세(George V, 1865~1936)와 일행들이 마차를 타고 달리고, 그 옆을 거지가 모자를 내밀며 따라 달리고 있는 모습.
현대 경마의 시초는 종주국인 영국에서 1789년 이래 매년 6월 첫째 주에 열리는 ‘엡섬 더비(Epsom Derby)’로 왕족들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왔다.
이날도 조지 5세와 왕족들은 엡섬 더비에 참석하기 위해 경마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사진이 찍히는 순간 조지 5세는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고, 그 옆에 앉은 셋째 왕자 글로스터 공작 헨리(Prince Henry, Duke of Gloucester, 1900~1974)도 거지의 모자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 2022년 엡섬 더비에 엘리자베스 2세를 대신해 참석한 앤 공주
1차 대전의 도화선이었던 사라예보 사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내외가 피살된 것이 불과 6년 전인 것을 생각해보면 신분이 불분명한 자의 근거리 접근을 허용하는 것도 놀라운 부분.
자세히 보면 달리는 거지의 왼쪽 가슴에는 훈장이 펄럭이고 있다. 아마도 그는 영국군 참전용사일 것이며, 그런 이유로 비록 거지지만 왕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인물이라고 안심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전쟁이 끝나고 경제불황이 이어지면서 군대에서 복귀한 참전용사들의 실업률이 매우 높은 상황이었다. 왕은 그에게 일말의 미안함과 책임감도 느끼고 있지 않았을까.
또한 원래 군주들은 지폐든 동전이든 현금을 소지하고 다니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설사 조지 5세가 동전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는 소비를 극도로 삼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1920년 영국 왕실재정은 45,000파운드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조지 5세는 사비 100,000만 파운드(2022년 현재가치 476만 파운드, 한화 약 75억 원)를 전쟁물자 후원에 기부한 지 몇 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신분은 천지차이지만 모자를 내미는 사람이나 마차에 앉아있는 사람이나 빈털터리인 것은 마찬가지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