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스스탄, 신부납치 관습 ‘알라 카추’로 벌어진 살인
2021년 4월 5일,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서 아이자다 카나트베코바(Aizada Kanatbekova / Айзады Канатбековой)라는 27세의 여성이 3명의 남성에게 퇴근길에 납치당했다.
사건 발생 이틀 후인 4월 7일, 경찰은 비슈케크 교외의 버려진 차 안에서 티셔츠로 목이 졸려 사망한 아이자다의 시신을 확인했으며 피해자는 납치과정 중 격렬한 저항을 벌이다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범은 36세의 남성으로 범행 후 자살하였고, 납치에 직접 관여한 남성 2명과 조력자 2명까지 포함해 용의자 4명이 체포되었다.(납치 순간의 영상)
사라지지 않는 납치혼 악습
아이자다 카나트베코바의 납치는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신부납치(신부 훔치기)’ 관습과 관련되어 있다.
▲ 아이자다 카나트베코바
얼마 전 러시아 다게스탄에서 일어난 여성 납치미수 사건(영상)도 납치혼이 목적이었다. 키르기스어로 ‘알라 카추(Ала качуу / Ala Kachuu)’라고 불리는 이 납치혼은 과거 유목생활이 주를 이루던 시절부터 행해진 결혼 관습으로 생활방식이 완전히 바뀐 현대에도 남아있다.
▲ 알라 카추
남성들은 친구들을 동원해 자신이 평소 점찍은 여성이나 혹은 무작위로 길가는 여성을 납치한 후 결혼서약에 동의할 때까지 집에 가둔다.
감금된 여성은 신랑의 어머니를 비롯한 친척들이 밤을 새워가며 고문을 방불케 하는 결혼 강요로 지치게 만드는데, 결국 굴복해 결혼을 승낙하거나 혹은 끝까지 버티고 구조될 수도 있지만 두 가지 선택 모두 여성은 불행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 결혼을 강요하는 모습
우선 학업이나 하던 일을 갑자기 그만두고 마음에 들지도 않는 남자와의 강제 결혼이 행복할리 없다. 여성은 폭력에 노출되고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결혼생활을 하게 되며 이는 키르기스스탄의 높은 이혼율과 고아 증가로 이어진다.
끝까지 결혼을 거부하고 돌아오는 것 역시 불행한 것은 마찬가지다. 순결을 중시하는 무슬림 국가에서 납치 경험은 여성에게 주홍글씨와 마찬가지이며, 감금 과정 중에 순결을 잃은 부정한 여성으로 간주되는 사회적 낙인을 벗을 수 없다.
2013년 납치혼은 법으로 금지되었으나 가해자들이 기소되어 법정에 서는 일이 거의 없다 보니 여전히 암묵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게다가 보복과 수치심을 두려워하는 여성들 역시 강제결혼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 악습이 유효한 결혼 수단으로 여전히 인기가 있는 것이다.
현재 아이자다 카나트베코바의 살해사건에 항의하는 500명의 시위대들이 비슈케크 거리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 항의 시위대
키르기스스탄 울루크베크 마리포프 총리는 시위대에게 살인자들은 반드시 처벌될 것을 약속하며 기다려줄 것을 요청했으나 시위대는 그의 사임까지 요구하고 있다.
결국 사디르 자파로프 대통령까지 나서서 이번 사건이 키르기스스탄 역사에서 마지막 신부납치 사건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아이자다 카나트베코바의 죽음은 그녀의 가족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의 고통”이라고 애도하며 국민들을 달래는 모양새다.
한편 비슈케크에 있는 UN 여성기구 사무소에 따르면 인구 650만 명인 키르기스스탄에서는 5건 중 1건의 결혼이 신부납치를 통한 강제결혼에 이르는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경찰의 안이한 대처
피해자의 어머니 나즈굴 샤켄노바(Nazgul Shakenova)에 따르면, 언젠가부터 딸이 거리를 걸을 때 낯선 남자가 뒤따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이자다는 처음엔 단순한 일로 여겼지만, 그 남자는 그녀의 직장과 거주하는 아파트 주소까지 알아내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차를 몰고 추적하기까지 했다.
▲ 아이자다와 어머니
딸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심각성을 깨달은 어머니는 남자의 차로 다가가 문을 열고 쫓아오지 말라며 경고도 수차례 했으나 안타깝게도 경찰서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이 ‘짝사랑 가지고 뭘 그러냐’라고 핀잔을 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머니의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하기엔 납치 후 실제로 벌어진 일이어서 큰 충격을 주었다. 아이자다의 납치가 신고되자 경찰은 웃으며 어머니에게 “곧 중매쟁이가 올 것이니 결혼을 준비하라”, “일상적인 신부납치니 걱정하지 말라”며 자기 주변의 일상적인(?) 납치혼을 들려주는 등 전혀 범죄로 간주하지 않는 분위기였던 것.
친구들 역시 납치영상과 번호판, 차량 모델, 납치범의 이름까지 모두 제공했음에도 아이자다를 찾으려고 하지 않은 경찰의 태도를 공개했고, 이는 국민들의 큰 분노로 이어지고 있다.
▲ 슬픔에 잠긴 가족들과 빈소
또 범인 자미르벡 테니자바에프(Zamirbek Tenizbaev)는 여러 건의 범죄를 저지른 전과자였다. 그는 과거 러시아에 거주하며 2008년 3월 20일 절도로 징역 3개월, 2009년 11월 26일 강도로 징역 2년, 2012년 7월 10일 강탈 및 강취로 징역 5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 후 키르기스스탄으로 추방되었고 러시아에는 영구 입국금지된 중범죄자다.
키르기스스탄에 돌아온 후에는 친척에게 빌린 차에서 노숙하다가 우연히 본 아이자다에게 반해서 쫓아다니기 시작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 남자친구라고 보도하는 기사도 있지만 오보이다.)
▲ 자살한 주범(좌)과 체포된 공범들
아이자다 카나트베코바는 한 달 전 키르기즈&터키 마나스 대학(kyrgyz-turkish manas)을 졸업하고 학교 배구선수로도 활동했으며 인권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여성이었다. 또한 얼마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외동딸로 이런 인권운동 이력과 어머니를 생각하면 당연히 격렬하게 결혼을 거부했을 것이 짐작된다.
살해된 아이자다의 주머니에는 다음 주 터키 이스탄불로 가는 비행기표가 들어있었다. 터키에서 자리를 잡고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이 목표였던 한 여성의 꿈이 사라져야 할 악습과 경찰의 무사안일한 태도가 결합되며 물거품이 되어버린 안타까운 사건이다.
▲ 하관식을 진행하는 모습
아이자다 카나트베코바는 고향 이식쿨 주의 발릭치(Balykchy) 마을에 있는 어머니의 집 근처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