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의 잃어버린 구두

보통 ‘잃어버린 구두’라고 하면 구두와 사랑을 찾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떠오르지만,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의 잃어버린 구두는 주인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보통 '잃어버린 구두'라고 하면 구두와 사랑을 찾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떠오르지만,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의 잃어버린 구두는 주인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1
▲ 마리 앙투아네트의 구두 | 프랑스 캉 미술관(Musée des Beaux-Arts de Caen)


1793년 10월 16일 오후 12시 15분, 단두대가 설치된 무대로 끌려 올라가다시피 오르던 그녀는 군중들의 조롱하는 소리에 계단을 제대로 볼 정신도 없었을 것이다.

 

그 순간 계단턱에 걸려 떨어진 구두 한 짝은 그것이 ‘전 왕비’의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한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 그렇지 않고서야 구두 한 짝이 지금까지 누군가의 소유였다는 생명력을 가지고 전해져 오기는 어려울 테니까.

 

보통 '잃어버린 구두'라고 하면 구두와 사랑을 찾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떠오르지만,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의 잃어버린 구두는 주인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3
▲ 구두의 좌측면과 내부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왕’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늘 호화스럽고 방탕하다는 이미지로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루머로 그녀는 ‘당장 죽어도 마땅한 여자’로 낙인찍혔다.

 

보통 '잃어버린 구두'라고 하면 구두와 사랑을 찾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떠오르지만,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의 잃어버린 구두는 주인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5
▲ 무슬린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Louise Élisabeth Vigée Le Brun(1783)


프랑스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반역죄인이 된 앙투아네트는 처형을 앞두고 교도관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다. 머리카락은 처형에 방해되지 않게 짧게 잘렸고, 밧줄에 묶인 채 손도 등 뒤로 결박당했다.

 

왕비가 남긴 마지막 말은 “실례합니다. 고의가 아니었어요(Pardonnez-moi, monsieur. Je ne l’ai pas fait exprès)”라는 자신의 머리를 곧 자를 사형집행인의 발을 실수로 밟고 남긴 사과였다.

 

보통 '잃어버린 구두'라고 하면 구두와 사랑을 찾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떠오르지만,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의 잃어버린 구두는 주인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7
▲ 처형당하는 마리 앙투아네트 | William Hamilton(1794)


이날 그녀는 자신의 구두와 머리를 모두 잃었고, 단두대가 만들어내는 대량 시신들을 처리하는 마들렌(Madeleine) 묘지에 묻혔다.

 

단두대로 처형된 목 없는 시신들은 대부분 미리 파놓은 구덩이 속에 던져졌고, 빠른 부패를 위해 염화칼슘이 뿌려졌다. 그나마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곳에서 관에 담겨 묻힌 유일한 매장자들로 알려져 있다.

 

보통 '잃어버린 구두'라고 하면 구두와 사랑을 찾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떠오르지만,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의 잃어버린 구두는 주인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9
▲ 속죄의 예배당


당시 왕과 왕비가 묻혀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는 현재 속죄의 예배당(Chapelle Expiatoire)이 지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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