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철모에 트럼프 카드를 꽂고 다닌 이유
미국이 참전한 베트남 전쟁시기(1965~1973)에 관련된 사진이나 영화를 보면 군인들이 철모(방탄모)에 트럼프 카드를 꽂은 모습이 흔히 보인다.
철모뿐만 아니라 탱크, 전투기에도 트럼프 카드가 꽂혀있거나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는데 무슨 이유일까.
행운의 부적
카드게임에서는 속임수를 쓰는 타짜가 아닌 이상 아무리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도 승리는 운에 좌우된다. 전쟁터도 이와 같아서 아무리 훈련을 잘 받은 특수부대원이라도 눈먼 총알이나 날아오는 파편 하나에 죽고 사는 것은 마찬가지.
▲ 두 해병대원 중 한 명의 철모에 조커 카드가 꽂혀있다. 1969.12.
즉 트럼프 카드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시피 부적과 같은 것이었다.
▲ 2차 대전, 컨살러데이티드 B-24 리버레이터(Consolidated B-24 Liberator)의 측면에 로열 스트레이트가 그려져있다.
내일, 아니 10분 뒤를 장담할 수 없는 전쟁터에서 무신론자란 존재하기 힘들다.
미국에서 트럼프 카드는 삶과 밀접한 문화였고, 서열이 높은 조합의 카드를 배치해 행운의 신에게 집으로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기원이었던 셈이다.
▲ 존 루이스(John L. Lewis)이등병이 철모에 하트 로얄스트레이트 플러시를 모으며 행운을 기원하고 있다. 1968.02.
사실 규율이 엄중한 군대에서 이런 눈에 띄는 트럼프 카드와 위장을 방해하는 페인트 그림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게 맞다. 하지만 군 사령부는 행운의 부적이 군인들의 사기를 올려준다고 믿고 허용한 것이다.
저승사자 스페이드 에이스
일설에 따르면, 트럼프 카드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 52장의 트럼프 카드는 52주로 이는 1년을 의미하며, 같은 무늬 13장은 한해의 음력 13달을 나타낸다. 빨간색 카드는 여성스러움·따뜻함·낮·긍정·진보를, 검은색 카드는 남성스러움·냉정함·밤·부정·퇴행을 상징한다.
물론 이는 트럼프 카드업체 측도 부인하는 우연의 일치지만 오랜 시간 민간풍속처럼 전해지고 있다. 이중 스페이드 에이스는 12월 21일부터 시작되는 겨울의 첫 주이다. 요즘은 성탄절이 끼어있는 즐거움의 시기지만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일 년 중 가장 힘든 시기로, 비축된 식량은 줄어들고 노인들은 죽음을 준비하며 유언을 미리 남기는 고난의 시기였다.
그런 이유로 스페이드 에이스는 죽음과 새로운 해가 함께 다가오는 상징이 되어 노예든 왕이든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카드(death card)‘로 칭해졌다.
이 죽음의 카드가 할 일이 많은(?) 전장을 지나칠 리가 없었다. 스페이드 에이스는 제1차 대전부터 전통적으로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미군과 영국군들 사이에서 먼저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후 프랑스와 독일군도 일부 사용하였다.
▲ 1차 대전, 영국군 12사단의 탱크에 그려진 스페이드(좌) | 2차 대전, 독일공군 메서슈미트(Messerschmitts)전투기에 그려진 스페이드(우)
1930년대에는, 갱단들의 다툼으로 살해된 두목의 손에 스페이드 에이스가 쥐어진 모습이 보도되면서 ‘죽음의 카드’는 문화적으로 더욱 공고해졌다.
▲ 뉴욕 코니아일랜드에서 사망한 마피아 두목 조 마세리아(Joe Masseria). 1931.04.15
살벌한 전쟁이라 할지라도 전투현장은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주를 이루는 곳인지라 온갖 속어와 문화들이 그 세대만의 것으로 소화되기 마련이고 베트남 전쟁에서 트럼프 카드는 용맹함의 다른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베트남에서는 일련의 도시괴담처럼 ‘도박을 인민의 적으로 보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베트콩들은 트럼프 카드를 두려워한다’는 소문이 퍼져 대량의 트럼프 카드를 적의 진지에 투하했다는 설도 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 스페이드 카드를 고르는 군인들
아시아 문화에서 트럼프는 생소한 물건이었기에 카드 자체는 북베트남(베트남 민주공화국)과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게 실질적인 공포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부 미군들이 전투 후 사살된 적의 입이나 몸 근처에 마치 쾌걸 조로의 ‘Z’표식처럼 스페이드 카드를 두고 가는 행위를 하면서 베트남인들에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의 카드로 인식되었다.
▲ 철모에 꽂힌 스페이드 에이스
미군은 이를 공포를 심어주는 심리전의 일환으로 사용했다.
적을 회유하는 전단지에 스페이드가 그려진 해골 문양을 그려서 뿌렸고, 베트남 사람들은 땅에 떨어진 스페이드 카드를 발견하면 그곳에 미공군의 폭격이 곧 있을 것으로 예상해 마을을 비우기도 했다는 증언이 있다.
▲ 전단지에 그려진 스페이드. ‘베트콩! 이건 죽음의 싸인이다!”
당시 카드 제조업체인 미국 플레잉 카드 회사(United States Playing Card Company)에게 전투(?)에 필요한 대량의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만을 제작해 줄 것을 요청한 부대도 있었다. 이에 사장이었던 앨리슨 스탠리(Allison F. Stanley)는 즉각 1,000장의 카드를 무료로 배송해주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 2004년, 아프가니스탄에 등장한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 레이디 데스(Lady Death)가 대마초 밭에서 탈레반을 잡고 있다.
이후 적에게 죽음을 선물하는 저승사자의 표식은 현대전인 걸프전과 아프가니스탄 전장까지도 사기진작을 위해 미군들이 즐겨 쓰는 문양으로 남아있다.
명예의 상징
스페이드, 하트, 다이아몬드, 클로버 등의 기호가 방탄모에 그려진 경우도 볼 수 있는데 이는 2차 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2차 대전, 제101공수사단 식별표시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이루어진 D-DAY에 제101 공수사단은 각각의 연대를 표시하는 상징물로 트럼프 카드의 기호를 채택했다. 미군 병사들은 적진에 떨어져 뒤섞이는 혼잡한 과정에서도 철모의 기호를 보고 서로를 쉽게 식별할 수 있었다.
▲ 1945년 3월, 아이젠하워 연합군 총사령관이 바스토뉴를 방어한 제101공수사단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이 중 스페이드 에이스는 바로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에 나왔던 그 유명한 제506 보병연대의 기호였다.
▲미군 방탄모에 그려진 트럼프 기호
스페이드 기호는 당시 제101 공수사단의 영광의 날을 기리는 의미로 기억되고 있으며, 각각의 트럼프 기호는 오늘날에도 여단전투팀을 식별하는 기호로 부여되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