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을 배신한 유대인, 안스 판 다이크(Ans van Dijk)의 처형
네덜란드 국적 유대인이었던 안스 판 다이크(Ans van Dijk, 1905~1948)는 1940년 암스테르담의 뉴벤딕에서 모자 가게를 운영하던 평범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1941년 나치의 유대인 사업체 소유 금지 정책에 따라 가게는 폐쇄되었고, 생계가 곤란해진 그녀는 나치 보안국의 스파이로 일할 것을 제안받고 수락한다.
안스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 없이 유대인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고, ‘숨어있는 동족들의 탈출을 돕고 싶다‘며 은신처의 주소를 받아냈다. 이런 방식으로 145명이 보안국에 손쉽게 체포되었고, 이 중 84명이 강제수용소에서 고통을 받으며 숨졌다.
큰 성과를 올리자 안스는 부서의 우수사원으로 상사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이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인생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유대인들이 대거 사라지며 신고할 대상이 점점 줄어들자 성과에 목마른 그녀는 친오빠와 그의 가족까지 수용소로 보냈으며(은신처 하나당 7.5점), 최종적으로 유대인 700여 명의 죽음에 관여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 재판받는 안스 판 다이크
종전 후 새 여자친구(그녀는 동성애자였다)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살고 있던 안스는 1945년 6월 20일 총 23건의 반역죄 혐의로 기소되어 전격 체포당했다. 그녀는 유죄는 인정했지만 ‘목숨에 대한 위협과 정신적인 문제로 인한 행동이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하지만 판사는 심리검사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고 1947년 9월 사형을 선고했다. 다급해진 그녀는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에게 탄원서를 보내 같은 여자라는 동정심에 호소하려는 시도를 하려고 했지만 암스테르담 특별법원은 이 요청마저 기각했다.
▲ 사형집행 직전의 모습
1948년 1월 13일, 안스 판 다이크는 최후의 시도로 가톨릭 세례를 받으면서까지 총알을 피할 수 있기를 열망했지만 결국 다음날 일출 직후 차가운 바람이 씽씽 부는 처형장으로 끌려 나와 총살형을 당했다.
안스 판 다이크는 네덜란드에서 나치에 협력한 사람 중 사형을 선고받은 유일한 여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