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패망 후 ‘보트피플’의 처절한 모습
1975년 4월, 월남(베트남 공화국)의 패망이 가까워옴에 따라 월남 국민들의 국외 탈출도 시작되었다. 오랜 기간 싸워온 적에 대한 공포는 이들의 발길을 국경 밖으로 이끌었고, 심지어 광활한 망망대해로 조각배를 타고 나가는 사람들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1975년 5월, 월남 난민 47명이 탄 배가 최초로 말레이시아에 도착했다. 언론은 이들을 ‘보트피플(Vietnamese boat people)’이라고 칭했다.
‘보트피플’은 월남이 패망한 시기부터 1980년대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적화통일 이후 재산을 빼앗기고 강제이주를 당하며 이등국민으로 전락한 계층들과 재교육 수용소를 경험한 사람들이 연이어 탈출을 시작한 것이다.
아래는 1970년대와 80년대 ‘월남 보트피플’의 처절한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 1975년 4월 15일, 월남의 패망과 함께 난민들이 국외 탈출을 위해 미국 군함으로 보트를 타고 접근하고 있다. 【사진: Dirck Halstead】
▲ 1975년 4월, 월남의 패망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비행기와 보트, 국경을 넘어 탈출했다. 【사진: Dirck Halstead】
▲ 1975년 4월, 7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월남 해군 함선(HQ-504)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 이들은 이 배를 타고 깜라인 만에서 붕따우 항까지 필사적으로 탈출했다.
▲ 1975년 4월, 남중국해에서 USS Durham(LKA-114)호가 소형어선을 타고 탈출한 월남 난민들을 옮겨 태우고 있다. 【사진: U.S. National Archives】
▲ 1975년 4월, 구조선에 사력을 다해 오르는 월남 청년의 눈빛.
▲ 1975년, 공산주의를 피해 탈출한 월남 청년들이 이제는 사라져 버린 국가의 국기를 흔들어 보이고 있다.
▲ 1978년, 캐나다 공항에 내리는 월남 난민 가족들. 이들은 낮은 임금과 캐나다 문화에 대한 적응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오랜 기간 힘든 시기를 겪어야 했지만 공산화된 고국을 탈출하지 못한 사람에 비하면 훨씬 나은 형편이었다.
▲ 1978년 11월 12일, 남중국해를 떠도는 2500명이 탑승한 보트가 말레이시아 해안에 정박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들을 거부하고 음식과 약품을 지급한 후 해상으로 돌려보냈다. 【사진: Alain Dejean】
▲ 1978년 11월 21일, 남중국해를 떠도는 보트피플 일가족들. 온몸에 발진이 난 아기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아버지의 모습. 【사진: Alain DeJean】
▲ 1978년 11월 21일, 남중국해를 떠도는 월남 남민들의 배의 갑판에서 비를 막기 위해 천으로 지붕을 만든 모습이 빈민가를 연상시키고 있다. 【사진: Alain DeJean】
▲ 1978년 12월 27일, 말레이시아에 도착한 보트피플이 당국이 자신들을 받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도착한 국가가 받아주지 않으면 하선할 권한이 없는 이들은 또다시 망망대해를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 Bettmann】
▲ 1978년 12월 28일, 퉁안호에 탑승한 2700명의 보트피플이 마닐라만에 정박하고 있다. 필리핀 당국은 자국의 난민캠프에 이미 3천 명이 수용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받아줄 수 없다고 통보하고 이들의 하선을 거부했다. 【사진: Bettmann】
▲ 1979년 1월 8일, 퉁안 호에 탑승한 2500명의 보트피플이 필리핀 마닐라만을 하염없이 떠돌고 있다. 【사진: Bettmann】
▲ 1979년 6월 12일, 영국에 도착한 월남 난민들. 아이들은 저마다 담요를 몸에 두르고 있다.
▲ 1979년 6월 22일, 말레이시아 동남부 쿠안탄 해변에 도착한 보트피플이 누군가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Bettmann】
▲ 1979년, 월남 난민 청년이 USS White Plains(AFS-4)호로부터 내려온 견인 로프를 붙잡고 있다.
▲ 1979년, 말레이시아 비동 섬의 월남 난민들. 비동 섬에는 1978년부터 2005년까지 난민캠프가 설치되어 있었다. 1978년 월남 남민 121명으로 개장한 비동 캠프는 1979년 1월 약 4만여 명의 난민을 수용하며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불렸다.
▲ 1979년, 월남 난민 소녀가 말레이시아 비동섬(Bidong Island)의 난민캠프에서 생각에 잠겨있다. 1991년 10월 30일 말레이시아가 난민캠프를 폐쇄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서방국가로 가지 못한 난민들은 베트남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난민들은 격렬하게 항의했으나 2005년 8월 28일까지 총 9천 명의 월남 남민이 강제 송환되었다.
▲ 남중국해에서 130명이 탄 난민 보트가 태국 해적들에게 습격을 당해 129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기사. 수많은 난민들이 바다를 떠돌다가 해적에 의해 죽거나 여성들은 납치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 1979년 8월, 태국의 반 비나이(Ban Vinai) 난민캠프. 이곳은 1975년부터 1992년까지 운용되었으며 주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에 동조했던 몽족(Hmong)들을 수용했기에 CIA는 이 난민캠프에 수백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하였다. 태국은 이들에게 영구체류권을 주지 않았으며 1985년부터는 강제송환에 나섰다. 【사진: Serge Viallet】
▲ 1979년 11월 1일, 중국계 월남 난민들이 판자촌을 방불케 하는 화물선을 타고 홍콩 해안에 대기하고 있다. 【사진: William Albert Allard】
▲ 소형 어선을 타고 탈출한 난민들의 열악한 모습. 어렵게 구한 배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고 탑승했다.
▲ 1982년 1월 6일, 난민들이 탄 보트가 구조를 바라며 USS Fox 순양함으로 다가오고 있다.
▲ 1982년 1월 6일, USS Fox 순양함이 발견한 월남 보트피플의 발 디딜 틈 없는 어선.
▲ 1982년 1월 6일, 앉을 기운도 없어 보이는 월남 난민들.
▲ 1982년 1월 6일, USS Fox 순양함 승무원들이 기진맥진한 여성 난민을 옮겨 태우고 있다.
▲ 1982년 1월 6일, 난민들을 모두 옮겨 태운 USS Fox 순양함 승무원들이 장비를 회수하며 어선에 남은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있다.
▲ 1981년 3월 20일, 남중국해에서 138명이 탄 월남 난민 보트가 USS 레인저(CV-61)에 접근하고 있다.
▲ 1982년, 베트남을 탈출한 보트피플이 남중국해를 떠돌고 있다. 폐선에 가까운 배지만 이들에게는 생명을 구하는 ‘구명정’이었다. 【사진: Michel Setboum】
▲ 1982년, 국경 없는 의사회에 구조되고 있는 보트피플. 【사진: Michel Setboum】
▲ 1982년, 구조선으로 옮겨진 월남 모녀가 매우 지친 기색이다. 【사진: Michel Setboum】
▲ 1982년, 구조된 월남 청소년들이 기진맥진해 있는 모습. 【사진: Michel Setboum】
▲ 1984년 5월 15일, 월남 난민 35명이 탄 어선이 USS 블루리지(LCC-19)의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베트남 깜라인만 북동쪽으로 550km 떨어진 해상에서 8일간 떠돌고 있었다. 【사진: U.S. National Archives】
▲ 1989년 4월 1일, 홍콩에 도착한 월남 보트피플. 70~80년대에 걸쳐 홍콩으로 탈출한 월남 남민들은 20만 명에 달했다.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 사무소(UNHCR)에 따르면, 월남이 패망한 1975년 이후 미국과 호주로 14만 3천여 명 이상의 난민들이 정착했으며 이 수치는 1990년 7600명, 1999년 70명으로 감소했다. 홍콩의 마지막 월남 난민캠프는 2000년 5월 31일 문을 닫았다. 【사진: Gerhard Jor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