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왕좌, 공작좌(Peacock Throne)
인도의 수도 델리, 그곳에는 타지마할로 유명한 무굴제국의 샤 자한이 마지막으로 건축했던 붉은 성이 있다. 붉은 성은 세포이 항쟁 당시 영국군에게 무자비한 포격을 당하여 많은 부분이 파괴되기도 했지만 1948년 네루가 제국의 정통성과 영광을 계승하여 인도의 독립을 선언한 민족적 상징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축물은 페르시아의 시인이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라는 시를 바쳤던 디와니카스(Diwan-i-Khas)이다.
▲ 디와니카스 외관과 내부
이 화려한 디와니카스에는 이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공작 왕좌(Peacock Throne)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옥좌는 네 개의 황금 다리를 가졌으며 다이아몬드와 루비, 에메랄드, 진주 등으로 새겨진 등받이와 12개의 기둥, 그 위에는 보석으로 수놓은 공작새의 날개가 펼쳐져 있었다고 하는데, 그 가격이 타지마할의 건축비를 능가한다고도 소개되고 있을 정도이다.
▲ 공작좌에 앉은 샤 자한
공작좌 최초의 주인인 샤 자한은 아들인 아우랑제브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아그라성에 유폐되어 아련하게 보이는 부인의 무덤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쓸쓸히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일화 때문인지 이 ‘공작좌의 주인이 된 사람들은 비참하게 권력을 잃게 된다‘는 저주가 전해지는데, 아버지의 권력을 빼앗은 아우랑제브는 이슬람교를 강요하는 정책으로 수많은 반란에 시달리다가 무굴왕조와 함께 붕괴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 아우랑제브는 무모한 종교정책의 반발로 인해 무굴제국을 쇠퇴하게 만들었을 뿐 비극적인 죽음을 겪은 것은 아니므로 저주를 받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후 델리를 점령한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Nader Shah)는 전리품으로 공작좌와 함께 많은 유물들을 취했으나 몇 년 후 쿠르드족과의 전쟁 중에 수하에게 암살당한다.
나디르 샤의 죽음 이후 공작좌의 행방은 기록에서 사라지지만 그 저주는 모조품을 만든 이란의 카자르 왕조에 이어 현대 이란의 마지막 국왕 팔레비에게까지 이른다고 전해지고 있다.
▲ 나디르 샤와 그가 지배했던 영토
어릴 때부터 전쟁놀이를 즐겼던 나디르 샤는 병법과 매복 기술에 능통하여 그 천재적인 군사 통솔력으로 인해 페르시아의 나폴레옹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도적떼의 왕에서부터 시작하여 오스만 제국이 있던 바그다드를 탈환하고 세력을 키워 아프샤르 왕조를 세운 후 초대 샤가 된 그는 동방원정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도망자들을 무굴제국으로 하여금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여러 차례 사신을 보냈으나 무굴제국의 황제 무하마드 샤는 듣지 않고, 세 번째 사신의 목을 잘라 보낸다. 분노한 나디르 샤는 직접 거병하여 1739년 델리를 침공, 대승을 거두어 항복을 받아내지만 입성 도중 인도 백성들이 돌을 던지고 보좌관 한 명을 죽이자 3만 명의 인도인을 학살하였다.
이때 무능한 왕 무하마드 샤를 용서해주면서 받은 선물이 바로 공작좌이다.
또한 무하마드 샤가 터번에 다이아몬드를 숨겨두었다는 정보를 시종을 통해 입수한 그는 우정의 상징으로 터번을 교환하자고 제의하면서 186캐럿의 다이아몬드 코이누르(Koh-I-Noor)까지 획득한다.
하지만, 델리 정벌 후 나디르 샤는 교만해지고 의심이 많아지면서 횡포를 거듭하다가 쿠르드족 반란 진압을 위해 출병하는 막사에서 잠을 자던 중 호위대장의 칼에 암살당하고 만다. 그리고 보석을 탐낸 쿠르드족에 의해 공작좌는 분해되어 흩어져버렸다.
칭기즈칸과 티무르를 존경했던 전형적인 전쟁광 나디르 샤에 대해 하루 종일 학살당했던 피정복민으로서는 당연히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므로 공작좌의 저주는 그 당시 델리 사람들의 저주라고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또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같은 시기 빼앗긴 다이아몬드 코이누르에 대해서도 저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페르시아어로는 고어누, 빛의 산이라는 뜻을 가진 코이누르의 저주는 공작좌와 마찬가지로 왕위를 잃거나 불운을 당한다는 내용인데, 여자가 착용하면 그 저주가 비켜간다는 단서가 붙어있다.
▲ 105.6 캐럿으로 잘린 현재의 코이누르(우)
코이누르의 저주를 받은 자는 나디르 샤가 대표적인데, 코이누르가 1849년 빅토리아 여왕의 소유가 되어 영국 황태후의 왕관에 꽂히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저주의 표본이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으며 더욱이 여자만이 가져야 한다는 내용은 그 출처에 대한 의심을 피할 수 없다.
※ 영국의 손에 들어간 이후 코이누르는 빅토리아 여왕, 알렉산드라 왕비, 메리 왕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착용했다.
▲ 코이누르로 장식된 영국 여왕의 왕관
결론적으로 비극은 혼란의 시대에 탐욕을 부르는 보물의 행방이 죽음으로 귀결된 것에 불과하며 그것을 강탈하거나 빼앗긴 자에 의해 저주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다른 이의 획득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인도에서는 빼앗긴 다이아몬드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진척이 없으며 공작좌가 있던 디와니카스는 현재 벽면의 약탈된 보석들의 자리와 함께 공허하게 방치되어 있다.
공작좌의 저주가 빛나는 보물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면 카자르 왕조에서 제작하여 전해 내려온 모조품 ‘태양 왕좌(Takht-e Khurshīd)’에 앉았던 팔레비 2세의 비극에 대해서까지 적용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 이란 테헤란 국립보석박물관에 있는 태양 왕좌(공작좌)
국가의 중흥을 도모하려던 팔레비 2세는 강경한 이슬람 반란세력의 폭동에 왕위를 잃고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야만 했으며 낯선 타국 땅에서 숨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작좌의 모조품은 이미 카자르 왕조의 초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카자르 왕조가 7대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모조품에 대한 저주 역시 상당히 과장된 느낌이 있다.
결국 공작좌의 저주라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단편적인 사물에 빗대어 설명하려는 호사가들의 결과론적 감상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