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사진의 뒷이야기 (64) 1938년, 아르헨티나의 나치 행사
1938년 4월 10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에스타디오 루나파크(Estadio Luna Park, 약칭 루나파크)에서 약 2만 명의 군중이 히틀러 경례(Hitlergruß)를 하며 독일국가를 부르는 모습의 사진.
1938년 3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조국 오스트리아를 향한 팽창주의 외교를 시작했다.
이미 오스트리아 영토를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합병에 대한 지지도를 검증하기 위해 그는 국민투표를 요구했다. 이에 실시된 투표는 4월 10일 오스트리아와 독일국민 유권자 중 99.73%가 찬성하는 결과로 나타나며 두나라는 합병되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주권’을 인정하며 개입하기를 거부했고, 히틀러는 재외 독일국민과 오스트리아인들까지 모두 애국심을 증명할 수 있도록 이들이 거주하는 모든 국가에 특별선박을 공수했다.
나치의 대규모 집회를 허용한 아르헨티나
그중 아르헨티나는 다른 국가들과 조금 달랐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로베르토 마리아 오르티스(Roberto María Ortiz, 1886~1942) 대통령이 아르헨티나 내의 학교와 기관에서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며 친나치 행보를 보인 것이었다. 덕분에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약 25,000명의 독일인들이 손쉽게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투표 결과가 나오자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현지의 오스트리아-독일협회(la Asociación Austro-Germana)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루나파크에서 위대한 안슐루스(Anschluss)를 찬양하는 집회를 가진 것이 이 사진들의 정체이다.
이 행사는 현지의 독일외교관들 뿐만 아니라 마누엘 프레스코(Manuel Fresco, 1888~1971)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도 참석하는 등 아르헨티나 정부와 지역 당국의 지원을 받은 대형 집회였다.
행사장 내에는 갈색 셔츠와 하켄크로이츠 완장을 찬 44명의 기수들이 웅장한 무대에 서있었고, 객석에는 고딕문자로 ‘하일 총통(Heil Fuhrer)’이라는 문구와 히틀러의 유명한 슬로건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총통(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이 적힌 깃발이 걸려있었다.
무대의 양쪽 끝에는 아르헨티나와 독일국기가 펄럭였고 중앙에 대형 하켄크로이츠가 부착되었다. 감격한 청중들은 일어서서 팔을 뻗은 채 독일국가를 제창했고 ‘하일 히틀러(Heil Hitler!)를 연신 외쳤다.
나치 집회 반대시위
하지만 루나파크 밖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행사장 주변으로는 혹시나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기마경찰과 군인들이 주둔했고 외국의 집회를 위해 모든 차량의 통행이 금지되는 전례 없는 조치가 취해졌다.
투표는 물론 행사소식을 미리 접한 아르헨티나 대학연맹(FUA)은 이를 허락한 정부에 대한 항의로 산마르틴 광장(Plaza San Martín)에서 대규모 애국집회를 신청했으나 황당하게도 ‘안전을 확보할 경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 부에노스아이레스 산마르틴 광장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약 5000명의 학생시위대가 산마르틴 광장에 모였고, ‘허가받지 않은 시위가 폭동으로 변질되는 것을 단속한다’는 명목으로 부족하다던 기마경찰과 군인 200명도 등장했다.
시위대는 ‘아르헨티나의 주권이 침해되었다‘는 의미로 국부이자 남미의 독립과 주권을 상징하는 산마르틴 장군(José de San Martín, 1778~1859)의 기념비를 점거하고 시위를 하려고 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무산되며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 광장 중앙의 산마르틴 장군 기념비
갈등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산마르틴 광장 점거에 실패한 시위대는 코리엔테스 지역으로 행진하면서 길가의 독일상점들에 대해 돌팔매질을 했다. 그리고 하켄크로이츠를 달고 있거나 독일에 우호적인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사람에 대한 공격으로 보안군의 진압을 야기했고 이 과정에서 두 명이 사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불행하게도 사망자 두 명은 정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길을 가던 40세의 스페인 남성이 기마경찰의 말에 짓밟혔고, 73세의 아르헨티나 노인이 폭동을 피하려다 길에서 넘어져 사망한 것.
‘독일 영토 밖에서 개최된 가장 큰 나치 행사’로 역사에 기록된 악명 높은 날이 이렇게 끝이 났다.
흑역사를 뒤로 한 루나파크
안슐루스를 찬양하는 집회 사진은 1992년, 아르헨티나 외무부가 1939년~1950년 사이에 작성된 139,544건의 문서를 기밀 해제하면서 드러났다.
아르헨티나 유대인협회(DAIA)에 따르면, 기밀문서에는 사진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로의 입국을 제한해야 하는 유대인 블랙리스트와 같은 기록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당시 아르헨티나에 대한 나치 독일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2차 대전 중 중립을 표방했던 아르헨티나가 어째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과 에리히 프리프케(Erich Priebke)와 같은 악명 높은 전범들의 피난처가 될 수 있었는지가 명확해진다고 설명했다.
▲ 에스타디오 루나파크의 외관
이와 같이 숨기고 싶은 흑역사를 간직한 루나파크지만 전후에는 수많은 국제 스포츠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미사, 축구 전설 디에고 마라도나의 결혼식을 비롯한 반전의 역사들을 담아나갔다.
세계적인 가수들도 루나파크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 1981년, 프랭크 시나트라의 루나파크 공연
프랭크 시나트라, 잭슨 파이브, 아하, 루치아노 파바로티, 오아시스, 듀란듀란, 딥 퍼플,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마룬 5, 사라 브라이트만, 비요크, 에드 시런 등 슈퍼스타들이 거친 이곳은 2007년 아르헨티나 국가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루나 파크에서 공연한 슈퍼주니어와 포미닛
또한 2010년대 이후에는 슈퍼주니어, 샤이니, 포미닛, 여자친구, 갓세븐, 트와이스, 몬스타엑스와 같은 K-POP 그룹들이 루나파크의 무대에 서는 등 한국과도 인연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