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궁녀가 순종에게 뺨 맞은 사연
천일청(千一淸, 1849~?) 상궁은 조선 말기의 궁녀로 7세의 나이에 왕후들의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궁에 입궐한 인물이다.
구한말 최후의 궁녀들 중 한 명이었던 만큼 ‘조선의 마지막 궁녀’라는 칭호로도 불리는데, 왕족들과 오랜 기간 가족처럼 지내온 세월 때문인지 눈치 없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다 순종에게 뺨을 맞은 사건이 있었다.
아래의 일화는 한일합방 후에 있었던 일로, 이왕직 찬시 이교영(李喬永)이 증언한 내용이다.
(전략) 순종은 간간이 궁녀들을 불러 머리맡에 앉혀놓고 강목(綱目)이나 명현전기를 읽게 하는 것이 낙이었다.
“내가 30년간 대행(大行, 순종)을 모시는 동안에 단 한번 진노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합방 후 어느 날 한 젊은 시녀를 곁에 불러 앉혀 무슨 옛 소설을 읽혔을 때 일입니다. 어떤 임금이 민재(民財)를 많이 긁어모아 호의호식하는 바람에 민정을 돌보지 않다가 마침내 애써 모아둔 만고(滿庫)의 재보가 일조에 남의 나라로 돌아갔다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옆에 앉았던 천(千) 상궁이 말했습니다. “
– 어느 나라 임금이든 그따위 짓을 하면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고 지탱하겠는가.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대행께서 홀연히 변색을 하시고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어친수(御親手)로 천상궁의 뺨을 치시며 「괘씸한 것! 사식 나가거라.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그같은 불측한 소리를…」하시며 진노하셨습니다.” 【이규태 역사 에세이 백 년의 뒤안길에서… 퇴출 후의 순종황제. 1999.10.26】
망한 나라의 임금 앞에서 망한 임금을 욕하는 궁녀의 모습은 마치 ‘남의 눈에 티끌만 보았지, 제 눈의 들보는 못 본다’는 옛 속담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듯하다.
순종은 평소 씨름선수들이 씨름하는 것을 구경하다가 ‘모래알이 다리에 박히는 게 안쓰럽다’라고 하며 자리를 뜰 정도로 심약했던 인물인 만큼 가까운 상궁의 뺨을 때린 것은 엄청난 분노의 표출이었다.
당시 천일청의 신분은 지밀제조상궁(至密提調尙宮)으로 상궁 중에 가장 높은 제조상궁과 왕족들을 지근에서 보필하는 지밀상궁을 겸하는 최고위에 있었다. 나이 역시 60대로 순종과는 25세나 차이가 나는 엄마와 아들뻘이라 어린 궁녀들 앞에서 체면도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 창덕궁 서향각에서의 친잠식. 윤비(가운데) 뒷편의 좌측이 천일청, 우측이 김충연이다.
비록 이런 불화가 있긴 했지만 천일청 상궁은 동갑이었던 김충연(金忠淵) 상궁과 함께 순종의 병상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이 있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또 1920년 4월 28일에는 영친왕의 결혼식이 도쿄에서 거행되었는데 이때 72세의 천상궁이 조선왕실 궁녀 복장으로 참석해 일본군 장교 복장을 예복으로 착용한 영친왕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기도 하는 등 이왕가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천일청 상궁을 직접 만나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단히 온순하고 친절한 성품을 지녔다고 하며, 조선왕실의 일원이나 다름없이 오랜 세월을 지낸 덕분인지 편안한 노후를 누리기에는 충분한 부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궁궐 밖에서는 이런 온순한 성품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 천일청 상궁의 젊은 시절
천일청 상궁은 연로한 몸으로 궁궐을 나온 후에는 불교계에 공양을 하며 노후를 보내고 있었는데 이를 노리고 돌봐주겠다는 사람들로부터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날리기도 하였다.
하도 사기를 당해 본인의 명의로 집을 얻으면 불안한 증세에 시달리자 남의 이름을 빌려 전셋집(적선동 88번지)을 얻기도 하였으나, 이 집도 명의자가 몰래 팔아먹는 바람에 1927년경에는 고소장이 오가는 기사가 나는 등 순탄치 않은 말년을 보냈다.
▲ 천황에게 진귀품 하사받은 김충연 상궁 【매일신보 1932.11.30】
반면 천상궁과 함께 마지막 최고위 상궁으로 왕실을 보필했던 동갑의 김충연 상궁은 83세이던 1932년 연말에 일본 천황으로부터 이왕실에 오래 근무한 공로(5세에 입궐)를 인정받아 진귀품을 하사 받았다는 기록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