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칠적과 경술국적의 매국노, 조중응의 딸과 부인들
1918년 새해를 맞아 매일신보는 조선의 대신으로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된 조중응(趙重應, 1860~1919)의 딸을 소개했다.
– 꽃인가 나비인가
– 자작 조중응 씨의 영양(令孃)
사진에 보이는 귀여운 아가씨는 자작 조중응 씨의 따님 숙호(淑鎬) 소저이올시다.
소저는 자작의 지금 부인인 내지 부인(일본인 아내)의 소생인데, 사진에도 보는 바와 같이 얼굴도 예쁘거니와 재질이 또한 영리하고 총명합니다.
요새는 날마다 덕수궁에 들어가서 복녕당 아기씨를 뫼시고 경구(京口) 선생에게 유치원의 교양을 받습니다. 새해에 여섯 살이 된다 합니다.
【매일신보 1918.01.01】
사진 속에는 설빔으로 기모노를 갖춰 입고 손가방까지 든 어린 소녀가 카메라를 응시하며 서 있는 모습이다.
짧은 기사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우선 기사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면 ‘복녕당 아기씨‘와 함께 유치원을 다니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복녕당 아기씨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로 알려진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이다.
▲ 아랫줄 좌측에서 우측 순으로 머리에 꽃을 꽂은 아이가 조숙호, 민영환의 딸 민용아, 덕혜옹주, 이재순의 손녀 이해순이다.
덕혜옹주가 다녔던 유치원은 그녀의 부친인 고종이 1916년 덕수궁 내에 만들어 준 것으로, 조선의 여러 귀족과 기업인들의 딸이나 손녀를 선별하여 함께 다니게 했다.
▲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조숙호. 가운데는 덕혜옹주
사실상 덕혜옹주만을 위한 유치원이었지만, 그만큼 이곳에 다닌다는 것은 당시 최고의 지위를 지닌 가문이라는 뜻이었다.
– 관련 글: 덕혜옹주의 유학과 결혼
일부이처를 허락받은 조중응
두 번째 문단에 있는 ‘지금 부인인 일본인 아내의 소생‘이라는 부분도 눈에 띈다. ‘지금 부인’이라면 또 다른 부인이 따로 있거나 있었다는 의미. 사실 조중응은 여자들과 관련된 문제로 인해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김홍집 내각의 일원이었던 조중응은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붕괴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때 그에게는 정실부인(사망한 것으로 추정)과 망명 직전 새로 맞은 부인이 있었는데 바로 전주 최씨 부인(1878~1914)이다.
▲ 전주 최씨 부인
혼례만 올린 최씨 부인은 부부로서의 예를 갖추고자 곧바로 시댁으로 들어갔다.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도 꽃다운 19세부터 조중웅이 귀국할 때인 1906년까지 10년간 전처의 소생인 조대호(趙大鎬, 1893~1932)와 시어머니를 지성으로 모셨다.
▲ 훗날 시베리아 내전에 소위로 참전한 조대호 (1918년)
하지만 동경외국어학교의 조선어교사로 일하며 기약없는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조중응은 같은 기간에 사가현 지사의 딸 미쓰오카 다케코(光岡竹子, 1880~?)라는 과부와 동거 중이었다.
▲ 미쓰오카 다케코(光岡竹子)
이후 친일내각이 다시 수립되자 조중웅은 특사로 귀국했고, 최씨 부인의 외로움도 그제야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홀로 귀국한 조선인 동거남이 대한제국의 농상공부 대신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미쓰오카 다케코도 곧 한반도에 입성한다.
그런데 10년간 동거했던 그에게 이미 결혼한 부인이 있는 상황, 미쓰오카는 ‘첩이 되기는 싫다‘며 난리를 피웠지만 그렇다고 먼저 혼인한 최씨 부인을 첩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씨 문중은 회의에 들어갔다. 10년간 독수공방하며 시댁과 전처의 아들을 양육한 최씨 부인의 공도 크지만, 망명 중인 조중응을 수발한 미쓰오카 다케코도 무시 못할 상황이었다.
▲ ‘벙글벙글’ 이라는 표현과 함께 두 살의 조숙호를 안고 있는 조중응 【매일신보 1914.01.10】
결국 이 이야기는 덕수궁의 순종에게 상주되기에 이르렀고, 순종은 유교질서 안에서 모범을 보인 최씨 부인에게 ‘훈3등 정경부인’ 작위를 내리고 좌부인(左夫人)으로 명하며 사실상의 일부이처를 허락했다. 미쓰오카 다케코는 우부인(右夫人)이 되었다.
이후 최씨 부인은 조중응과의 사이에서 아들 조문호(趙文鎬, 1908~?)를 낳았고, 미쓰오카 다케코는 딸 조숙호(趙淑鎬, 1913~?)를 낳았다. 서두에 등장하는 유치원 사진의 기모노를 입은 여섯 살 여자아이가 바로 그 아이이다.
좌부인 최씨의 갑작스러운 사망
1914년 2월, 최씨 부인은 갑작스러운 신병에 걸려 백약을 다 써보았지만 병세가 회복되지 못하고 결국 11월 19일 오전 9시에 불과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0년을 고생하다 아들도 얻고 행복을 누리나 싶더니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11월 22일 오전 8시 30분, 영락정(현 서울 중구 저동)에 있던 조중응의 집에서 발인을 시작하자 일곱 살의 어린 아들 조문호는 상여를 향해 “어머니 어디 가세요“를 외쳐 집안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 또 10년 간 극진한 봉양을 받았던 시어머니도 떠나는 며느리의 관을 향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 최씨 부인의 상여행렬【매일신보 1914.11.23】
최씨 부인의 장례식에는 기업체와 관리, 총독 부인 등이 보낸 조화 수백 개가 늘어섰고, 오전 11시 청량리에서 열린 영결식에서도 정무총감이 분향을 시작하자 이완용, 박제순, 이윤용, 윤택영, 윤덕영, 민병석, 박제빈, 박기양, 이병무, 임선준, 이재곤, 민영휘 등 명사들이 줄을 이었다.
또 경무총감부에서는 특별히 순사 여덟 명을 보내와 경기도 양주 금곡의 선산의 묘지까지 호위하게 하는 등 특별대우가 따랐다. 사실 이는 오로지 최씨 부인의 덕이라기보다는 조중응의 지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
우부인 미쓰오카 다케코의 배신
이로부터 불과 5년 후인 1919년 8월 25일, 조중웅도 병을 앓다가 별세했다. 유족은 장남 조대호(27), 차남 조문호(12), 장녀 조숙호(7), 모친 반남 박씨 부인(82), 미망인 미쓰오카 다케코(40), 며느리 박승원(조대호의 부인, 26)이었다.
이날 매일신보는 미쓰오카 다케코에 대해 ‘남편과 금실이 좋고 평시에는 자녀의 교육을 위해 동경에 가있다가 남편의 병세가 악화되자 네 달 전에 조선에 돌아와서 간호에 전력하였고 임종 시에는 졸도까지 하였다’라고 하며, ‘이 부인으로 말하자면 정숙하고 현명함이 족히 일반 부녀자들의 거울인 모범 인물‘로 말하고 있다. (매일신보 1919.08.27)
▲ 장례식의 유족들. 왼쪽부터 장남 조대호, 차남 조문호, 미망인 미쓰오카 다케코와 조숙호이다.
하지만 그렇게 헌신적인 인물이 병상에 누운 남편을 두고 자녀교육을 핑계로 동경에 머물다가 병세가 악화되자 그제야 귀국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또 해당 기사는 조문호와 조숙호를 모두 미쓰오카 다케코의 친자들로 소개하고 있는데, 불과 5년 전 최씨 부인이 사망할 때 같은 신문에서 그녀의 아들인 조문호의 절절한 슬픔을 묘사한 것을 확인하지 못한 모양이다.
▲ 조중응의 장례 행렬과 폭우에도 구경나온 인파 【매일신보 1919.08.31】
어쨌든 비통한 일을 겪은 가문의 사람들에 대해 좋은 쪽으로 기사를 써준 것으로 보이지만, 미쓰오카 다케코는 장례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실부인‘이라는 법적 지위를 이용해 조중응의 유산을 모두 가로챈 다음 동경으로 출국해 버려서 유족들의 생계가 곤란에 빠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사실 이는 조중응의 자업자득이었다. 좌부인이었던 최씨 부인이 별세하자 그는 불과 1년 후인 1916년 5월 26일에 기다렸다는 듯이 미쓰오카 다케코를 정실부인으로 입적하고 큰 잔치를 열어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것이다.
미쓰오카 다케코는 한때 순정효황후 윤씨의 일본어 교사로 궁까지 드나들었으나 오만불손한 말과 행동으로 구설수에 올랐고, 결국 궁궐 출입금지를 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정숙하고 현명한 여인‘이라는 수식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쩌면 기자가 최씨 부인의 품행에 대한 소문과 혼동한 것이 아니었을까.
– 참고문헌:
• 每日申報. 조중응씨부인의장례 (1914.11.23)
• 每日申報. 鳴呼 故趙重應子 (1919.08.31)
• 조선일보. 우리의 것을 아는 大連載. 左夫人 (1971.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