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의 20년 만의 귀국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 영친왕비(英親王妃) 이방자(李方子, 1901~1989) 여사는 다른 황족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패전 후 평민이 되며 모든 특권을 박탈당했다.

 

새로 건국한 한국 정부도 이왕가(李王家)에 냉담했기에 영친왕 내외는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 한국땅을 밟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일본과 한국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 생활을 하던 중 이방자 여사가 20여 년 만에 귀국을 허락받고 홀로 입국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 영친왕비(英親王妃) 이방자(李方子, 1901~1989) 여사는 다른 황족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패전 후 평민이 되며 모든 특권을 박탈당했다. 1
▲ 마중나온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는 이방자 여사

 

1962년 6월 14일 낮 2시 10분, 노스웨스트 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발을 디딘 이방자 여사는 우레와 같은 환영박수와 꽃다발 세례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당시 공항에는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1854~1911)가 설립한 진명여고, 숙명여고, 숙명여대의 학생 400명이 마중을 나갔으며 이왕가 종친들과 상궁들, 그리고 귀국에 적극적으로 힘을 쓴 김을한 기자의 부인 민덕임 여사도 함께 했다.

 

– 관련 글: 덕혜옹주의 동창생, 민덕임 여사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 영친왕비(英親王妃) 이방자(李方子, 1901~1989) 여사는 다른 황족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패전 후 평민이 되며 모든 특권을 박탈당했다. 3
▲ 꽃다발을 받아든 이방자 여사

 

이날 이방자 여사의 내한은 뇌일혈로 와병 중인 영친왕 이은을 대신해 윤비에게 문안을 올리고 일본 천황의 친서를 전달하는 것이 표면적인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철저하게 한국 정부로부터 귀국이 반대되었던 만큼 여사의 내한은 곧 부부의 귀국이 허락될 신호탄으로 추정되었다.

 

겨우 6일간의 일정이었지만 이방자 여사가 머물 창덕궁 내 낙선재(樂善齋)는 오래전부터 구들장까지 뜯어내고 장판을 새로 깔고 대조전(大造殿)에서 가구도 가져다 놓았으며 욕실에는 보일러까지 설치하는 등, 사람이 상주할 집으로 단장되고 있었던 것.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 영친왕비(英親王妃) 이방자(李方子, 1901~1989) 여사는 다른 황족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패전 후 평민이 되며 모든 특권을 박탈당했다. 5
▲ 낙선재 마당을 단장하는 모습(좌), 대조전에서 침대를 낙선재 안채로 옮기는 모습(우)

 

실제로 한국 정부는 영친왕의 병세가 차도를 보이는 대로 귀국하는 것으로 이미 일정을 잡아놓고 있었으며, 이방자 여사는 내한 중 한국국적 회복에 대해 논의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 영친왕비(英親王妃) 이방자(李方子, 1901~1989) 여사는 다른 황족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패전 후 평민이 되며 모든 특권을 박탈당했다. 7
▲ 영친왕비 장례식 운구행렬(1989)

 

결국 1963년 11월 22일 영친왕 내외는 영구 귀국하였다. 이방자 여사는 영친왕 별세(1970년) 후에도 홀로 낙선재에서 기거하며 장애인 복지활동에 힘을 쏟다가 1989년 4월 30일, 향년 87세로 곡절 많은 삶을 뒤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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