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숭실대학교에서 열린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

1921년, 평양기독청년회(YMCA)는 5월 19일부터 20일까지 평양 숭실대학교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를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같은해 2월에 조선체육회와 매일신보가 주최한 배재고보에서 열린 전조선축구대회와 이름까지 같은 대회였지만, 해당 대회가 참가팀들의 폭력사태로 인해 결승전은 열리지도 못하고 폐회한 만큼 ‘제대로 된 최초의 축구대회‘라는 타이틀을 가져오기에는 절호의 찬스였다.

 

1921년, 평양기독청년회(YMCA)는 5월 19일부터 20일까지 평양 숭실대학교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를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
▲ 1921년 2월에 열린 전조선축구대회 모습. 폭력사태로 결승전은 열리지 않았다.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 대회요강

 

1. 일시: 5월 19일, 20일 양일간 오전 9시~오후 6시까지 (단, 참가단체가 많을 시에는 경기 기일을 연장하고 우천 시는 순연)

2. 장소: 평양 숭실대학교 운동장

3. 참가단체: 중등학교와 청년 구락부 두부문으로 함(단, 본회에서 합격자로 인정하는 자에 한함)

4. 선수: 선수는 11인, 후보는 2인으로 하고 캡틴은 선수 중에서 정함.

5. 복장: 참가 선수는 각단체의 일정한 운동복과 모자를 착용함.

6. 경기시간: 예선과 결승은 모두 60분으로 함.

7. 응원: 각단은 본회 지휘대로 응원하며 비신사적 행동을 일절 엄금함.

8. 승부: 정규시간 내에 승부가 나지 않을 시는 성적으로 승부를 결정함.(단, 성적은 코너킥 2점, 페널티킥 3점, 프리킥 1점으로 계산)

9. 기타: 경기방법은 축구 규칙에 의하되 미비한 점은 주심의 재량에 따름.

 

이 시기 조선 각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축구시합이 열리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정확한 규칙과 유명한 심판을 초빙한 제대로 된 축구대회가 열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각지로부터 이를 격려하는 거액의 기부금도 답지했다.

 

참가팀


초대 전조선축구대회의 우승을 노리는 팀들은 5월 15일 내로 평양 남문통 4정목에 있던 평양YMCA 임시사무소 야소교서원(耶穌敎書院)에 선수 13인의 명단과 함께 참가신청서를 접수해야 했다.

 

참가팀들은 아래와 같다.

 

■ 학생부
• 평양 광성학교
• 평양 숭덕학교
• 휘문고등보통학교
• 숭실학교
• 평양관립고등보통학교
• 선천 신성중학교

 

■ 사회부
• 천도교청년회
• 불교청년회
• 기성운동단
• 숭실사회단
• 무오단
• 서울청년회
• 광성단
• 반도청년구락부


하지만 대회는 날씨부터 순조롭게 도와주지 않았다.

 

원래 19일 오전 9시에 시작되어 20일에 끝날 예정이었던 전조선축구대회는 17~18일에 내린 폭우로 숭실대학교 운동장이 진창이 되는 바람에 19일 오후 1시부터 21일까지 3일간 열리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1921년, 평양기독청년회(YMCA)는 5월 19일부터 20일까지 평양 숭실대학교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를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3
▲ 평양 시절의 숭실대학교 운동장


대회 2~3일 전부터 평양시내의 여관들은 손님들로 만원이었으며, 경기장 밖은 3~4만명에 달하는 군중으로 대혼잡을 이루었다.

 

승부에 불복한 폭력사태


100년 전이었던지라 현재와 비교하면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의 기술은 부족했고 규칙도 완벽하게 적용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관중들만큼은 현대 유럽축구의 훌리건과 다를 바 없었던 것 같다.

 

둘째 날, 경성 천도교청년회와의 경기에서 숭실사회단이 패하자 퇴장하던 관중들 사이에서 시끄러운 소요가 일어났다. 그들이 분노한 대상은 주심으로 ‘경기를 정시보다 5분 일찍 끝냈다‘는 것.

 

관중들이 주심에게 항의하자 주심은 “오히려 경기를 10분 더 했다“며 일축했고, 이에 숭실학교 학생들은 “심판을 죽여라!“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경성 휘문고에 패한 평양 숭덕학교까지 심판 판정에 분노를 일으키자 전조선축구대회 회장 김득수(金得洙)가 단상에 올라 일갈했다.

 

여러분 이것이 학생들입니까? 이것이 선생들입니까? 이러고야 어찌 선생이며 학생이라고 말할 수 있소! 설혹 피차에 미혹(迷惑)한 일이 있으면 서로 의논할 것이지 폭동을 일으킬 필요는 없는 것 아니오!

 

그러자 숭실, 숭덕학교의 학생들과 일부 선생들은 뉘우치기는커녕 분개하여 “저 놈 김득수를 잡아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1921년, 평양기독청년회(YMCA)는 5월 19일부터 20일까지 평양 숭실대학교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를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5
▲ 육혈포로 진압해야 했던 사태

 

결국 주심 현홍운(玄鴻運)은 보호를 받으며 퇴장해야 했고, 학생들은 점점 더 흥분하여 거리로 나와 남의 집 울타리에 있는 돌까지 빼서 던지며 폭동을 일으켰다. 이날 사태는 평양경찰서 경관들이 권총까지 허공에 발포해 진압해야 했으며, 주심 현홍운은 야밤을 틈타 숙소를 몰래 다른 곳으로 옮겼을 정도였다.

 

한반도의 뜨거운 스포츠 열기


마지막 날 열린 휘문고와 평양고등학교의 학생부 결승전은 그야말로 혈투였다.

 

양 팀이 접전을 일으키다가 심한 몸싸움이 일어나면 관중들까지 흥분하였으나 다행히 해당 학교의 선생들이 막아서며 불미스러운 사태는 없었다. 경기는 휘문고의 승리로 돌아갔고 원정에 동행한 수백 명의 휘문고 학생들은 우승의 희열에 가득 찼다.

 

학생부 결승은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끝났지만 사회부 경기는 파행이었다.

 

5분을 억울하게 빼앗겼다‘라고 주장하는 숭실단 측이 이의를 인정해달라고 하면서 결승전이 열리지도 못하게 두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지친 수만 명의 관중들이 숭실 측을 원망하고 있었는데, 이런 불온한 분위기에서 어떤 학생들은 주머니에 돌을 잔뜩 넣고 있거나 몽둥이를 소지하는 등 폭력사태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우승기를 받으려고 사회부 결승전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휘문고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먼저 퇴장하였으며, 천도교청년회 역시 “우리가 경성에서 멀리 원정을 왔는데 이처럼 불미스러운 일이 있으면 이 대회에 참가한 의의가 없다”면서 대회포기를 선언했다.

 

1921년, 평양기독청년회(YMCA)는 5월 19일부터 20일까지 평양 숭실대학교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를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7
▲ 축구 경기장의 살벌한 풍경


주최측은 몇 차례 권고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호전될 조짐이 보이지 않자 결국 부전승으로 평양 무오단의 우승을 발표하고 오후 2시에 해산했다. 초대 대회의 결승전이 허무하게 결정된 것이다.

 

어쨌든 학생부에서 우승한 휘문고 선수를 포함한 원정 응원단 200명은 현장에서는 받지 못한 영예의 우승기와 은제 메달을 들고 22일 오전 6시, 경성으로 돌아오는 열차에 탑승했다.

 

싸우지 않고 사회부 우승기를 획득한 무오단도 평양의 포목상 김항건, 이정준 씨 외 10인이 주최하여 5월 29일 오후 3시부터 평양에서 성대한 연회를 개최하였다. 많은 팀이 모이지도 않은 초창기 대회의 우승, 그것도 폭력사태를 동반한 부전승이었음에도 이와 같은 환대가 있었던 것을 통해 100년 전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던 스포츠에 대한 폭발적인 열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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