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혁명 전후 달라진 이란 여자들의 삶
알려져 있듯이 이란 사람들의 생활모습은 이슬람 혁명 전후가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이는 특히 여자들에게 더 극명하게 나뉘는데, 혁명 전이 밝은 세계였다면 현재는 어둠에 싸여있다고 할 수 있다.
1979년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1~1989)가 이란의 국왕 모하마드 레자 샤 팔레비(Mohammad Reza Shah Pahlavi, 1919~1980)를 쫓아낸 후, 불과 몇 달 사이에 이란여성들이 쟁취해낸 진보의 역사는 수십 년을 후퇴했다.
▲ 팔레비 국왕(좌)과 호메이니(우)
세계화 시대에 어쩔 수 없이 아주 조금씩 개선되어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혁명 전 모습의 발끝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
1979년 이전의 이란여성들
온라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게시물 중의 하나가 바로 혁명을 기준으로 완전히 대비되는 젊은 이란여성들의 사진이다.
▲ 혁명 전 캠퍼스의 이란 여대생들 【사진: Nevit Dilmen】
샤는 통치기간 동안 터키를 롤모델로 이란을 현대화하여 서구사회와 경쟁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이에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도록 장려되었고, 남녀 구분 없이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 1960년대, 남녀가 함께 수업을 받는 모습
이런 샤의 기조와 함께 여성인권단체의 노력이 더해짐에 따라, 1963년 2월 26일에는 이란여성들에게 투표권과 의원이 될 수 있는 기회도 열리며 참정권을 부여받았다.
그해 연말에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는 6명의 여성의원이 당선되는 감격적인 역사가 시작되었고, 샤는 권한에 따라 2명의 여성의원을 추가로 임명했다.
▲ 1978년, 이란의회를 방문한 미스 이란 출전자들이 의회 여직원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당연히 호메이니는 이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여성의 투표권은 매춘과 같다‘라고 주장하며 이슬람 종교지도자와 지지자들을 규합해 여성 참정권 반대시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현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샤는 너무 급진적이었고, 이란국민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과대평가했다.
▲ 망명길에 오르는 국왕내외
국왕 내외는 평소 양복 정장을 선호했는데, 이는 본인들 뿐만 아니라 국가공무원들에게도 권장되었다. 또 공공장소에서 히잡이나 차도르를 쓰는 것도 금지시켰다. 과거 조선에서 시행되었던 단발령과 마찬가지로 오랜 이슬람 전통으로 이어져온 여자들의 복식철폐는 ‘국가가 시행하는 금지‘가 아니면 제대로 적용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이란 젊은이들, 특히 젊은 여성들은 이 정책에 거부감이 없었다. 하지만 나이 든 사람들은 동화되기 힘들었고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였을 것이다. 결국 전통적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지도자들이 출현해 자유를 ‘억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규합하며 반정부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1979년 혁명 이후
“이란 정부는 알라신으로부터 합법성을 얻을 것이며, 새로 들어설 정부에게 이슬람 국가의 빠른 재건을 요구한다.”
–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 이란 혁명시위대
혁명 후 새로운 지도자로 이슬람 종교지도자인 호메이니가 등장한 것은 즉각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다가올 이란의 미래는 중세 원리주의 이슬람사회로 회귀하는 것이었고, 그동안 이란 사회를 병들게(?)했던 서구의 영향력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 샤를 지지하는 여성을 호메이니 지지자들이 제압해 끌고 가는 모습
샤 팔레비가 시행했던 모든 여성들의 권리는 호메이니의 손짓 하나로 폐기되었다.
이슬람혁명정부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상은 다음과 같다.
• 이슬람 율법에 따라 여성의 법적 혼인연령은 9세로 낮춘다.
• 1981년 동해(同害) 복수법이 부활하여 간통죄는 돌팔매로 처벌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 호메이니는 여성의 이익과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병원이나 관공서 등 공공장소를 방문하는 여성들은 항상 남자가족이나 친척을 동반해야 하며 이를 증명하는 가족관계서류를 지참해야 한다.
• 성별분리가 이란 사회의 모든 면에서 시행되었다. 버스에서도 남성은 앞 좌석에 앉고, 여성은 뒷좌석에 앉도록 법으로 규정되었다.
• 법적으로 여자의 증언은 남자가 하는 증언의 50%의 효력을 가졌다.
• 혁명정부는 가족계획을 이란을 약화시키려는 서구의 공작으로 규정하고 여성들의 피임 혹은 건강상의 낙태를 금지시켰다.
• 모든 탁아소는 ‘모성애를 약화시키고 자녀들을 무슬림으로 양육하는 것을 막는 서방의 음모’로 규정되어 폐쇄되었다.
가장 결정적으로 달라진 것은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머리카락을 가리는 ‘히잡’을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하는 것이었다.
▲ 호메이니를 지지하는 시위대
정신적으로 타락한 사회를 이슬람사회로 재건하기 위한 정부기관이 창설되었고, 복장규정을 위반한 불량여성들을 전담하는 ‘악행 방지 및 선행권장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국민을 지켜야 할 혁명수비대는 복장을 위반한 여성들을 감시하고 제압하는 훈련을 시작했다.
이란여성들의 뒤늦은 궐기
이런 세상을 눈앞에 둔 이란여성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음은 당연했다.
수많은 여성인권단체가 샤의 통치시기에 ‘여성에게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불합리한 여성차별을 철폐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며 호메이니의 시위에 동참했으나 이후의 전개가 자신들이 생각한 것과 반대로 흘러가자 충격과 배신감에 휩싸였다.
▲ 충격으로 거리로 나온 여성들 【사진: Hengameh Golestan】
호메이니가 혁명의 명분을 만들고 반정부 세력의 거대한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에는 여성들의 적극적인 지원도 작용했다.
그는 ‘여성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니 시위에 적극 동참할 것‘을 독려했었고, 이는 여성들로 하여금 새로운 정부는 지금보다 더욱 여성에게 확대된 권리를 제공함으로써 남성과 평등한 세상을 앞당길 것이라고 오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 히잡반대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 【사진: Hengameh Golestan】
크게 실망한 여성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혁명시기의 반정부 시위가 여성단체와 이슬람 종교단체의 지원에 의한 것이었다면, 히잡반대시위는 삶에 위기를 느낀 이란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나와 반대를 외쳤던 진정한 ‘개인‘으로써의 시위였다.
▲ 분노한 여성의 절규 【사진: Hengameh Golestan】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이슬람혁명정부는 이 저항을 간단히 묵살했고, 혁명수비대를 투입해 폭력적인 진압으로 이들을 무력화했다. 1979년 3월 9일의 히잡반대 시위는 이란여성들이 찰랑거리는 머리를 휘날리며 거리를 누빌 수 있었던 최후의 날이었다.
▲ 시위에 참여한 여성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 【사진: Hengameh Golestan】
이후 해고와 퇴직을 통해 이란사회에서 여성의 존재감은 빠르게 감소되어갔다. 70여 년에 걸쳐 획득한 이란여성들의 권리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사라졌고, 이 시기 약 24,000명의 여성들이 일자리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