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라디오가 사치품이었던 시절
지금은 라디오가 인터넷과 TV에 상대적으로 밀려난 매체지만 100여 년 전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마치 1990년대 후반의 휴대폰, 2000년대 후반의 스마트폰의 열풍처럼 최첨단 기기 ‘라디오’의 출현에 언론과 대중은 흥분했다.
아래는 당시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의 출범을 알리는 기사이다.
– 반도 가곡을 세계에 소개할 경성방송국
– 만단 준비가 전부 완성되어서 오는 20일부터 방송을 시작, 우선 1개월에 2원씩
세계의 인기를 홀로 끌 고급 진적으로 발전되어가는 것은 무선전화(라디오)이다.
경성에서도 일찍이부터 체신국에서 가방송(假放送, 시험방송)을 하여 그때부터 이미 일천수백 명의 청취자가 있었던 바, 이번에 정동에 경성방송국이 창설되어 이미 사옥도 낙성되고 오는 20일부터 완전한 본방송이 시작하게 되었다.
동 방송국에서는 국상으로 인해 얼마 동안 방송을 중지하고 착착 준비를 진행 중이며, 한편으로 시내 시외의 청취자를 모집 중인 바 의외로 성적이 매우 양호하다.
물론 본방송이 되면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아니하고 가지가지를 방송할 터이며, 아직 청취자가 적고 처음임으로 청취료는 한 달에 2원씩 받게 되었다 하는데 취미와 오락이 없는 조선가정에는 비교적 싸고 더할 수 없는 오락기관이 되겠으므로 방송국에서도 전력을 다하여 선전과 발전에 노력하는 중이며, 차차 발전됨에 따라 동경 오사카 모양으로 ‘라디오 대학’을 세워 하루에 몇 시간씩 갖은 학과를 전문가에게 청탁하여 가정에 있으면서 라디오로 공부를 하게도 할 것이다.
이번 방송기계는 실로 우수한 것이라 능히 조선의 가곡이 세계에 들리게 되는 것이라, 이점으로 보아도 JODK의 명성은 세계의 인기를 끌 것이다. 【매일신보 1927.01.11】
경성방송국(JODK)은 한반도 최초의 무선방송국으로 기록된 곳으로 일본 입장에서도 도쿄(JOAK), 오사카(JOBK), 나고야(JOCK)에 이어 네 번째 라디오 방송국이었다.
▲ 체신국 시험방송실에서 음악을 방송하는 광경 【동아일보 1925.06.26】
재미있는 것은 라디오를 ‘무선전화’라고 표기하고 있는 부분인데, 20세기 초는 라디오를 무선전화로도 불렀던 시절이다.
이런 현대와 다른 용어 사용으로 인해 당시 라디오를 듣는 모습을 설명하는 문장 속에 있는 ‘Portable Wireless Phone’이라는 문구 때문에 ‘세계 최초로 휴대폰을 사용하는 모습’이라는 오해가 종종 반복되기도 한다.
▲ ‘Portable Wireless Phone’ 문구 때문에 휴대폰 사용으로 오해되는 영상.
한편 경성방송국 출범 당시 라디오 방송 청취료가 ‘한 달에 2원’이었다는데 1927년의 신문기사에 등장하는 각 직종의 월급을 보면,
• 교사가 70원.
• 시골학교 교사 50원.
• 대구 전매국의 직공이 35원.
• 소작농이 37원 50전.
• 조선은행 소각소에서 일하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수석졸업생 김양의 월급이 30원.
• 월급이 후했던 철도국 고등학교 졸업생이 최고 80원, 대학 졸업생이 150원을 받았다.
즉 일부 고소득 직종을 제외하면 라디오 청취료 월 2원은 설치비까지 감안하면 상당히 부담스러운 금액이었기에 방송 전부터 특정 계급의 전유물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고, 결국 가입자가 생각보다 늘지 않자 10월 1일부터는 절반 가격인 1원으로 낮추게 된다.
▲ 도입초기 사치품이었던 라디오 【동아일보 1929.01.02】
지속적으로 가입자가 늘자 방송국에서는 ’10만 명을 돌파하면 요금을 70전으로 인하할 것’을 천명했고, 1938년 4월 1일부터 더욱 인하된 요금을 적용했다. 1940년 7월 말에는 총 라디오 청취자가 192,012명을 기록했으며 이중 조선인이 95,153명. 일본인이 96,027명으로 거의 비슷한 수를 기록했다.
▲ 1926년, 정동 경성방송국 사옥
이후 전쟁의 시대가 이어지고 종이신문의 발행이 여의치 않아졌다. 이에 따라 하루 늦게 소식이 전달되는 신문(동아일보)의 구독료 1원에 비해 더 저렴하고 빨리 뉴스를 접할 수 있었던 라디오의 인기는 높아졌고 일제로부터 해방 직전인 1944년 12월 31일에는 30만 가입자를 돌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