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사진의 뒷이야기 (88) 1984년, 소련차량에 판매를 거부하는 주유소
1984년, 캐나다 토론토의 한 주유소에서 손님과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 커다란 입간판에는 휘발유 가격 대신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우리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할 때까지 라다 차량에는 휘발유를 팔지 않습니다”
“We will not gas LADAs until… Soviets withdraw”
▲ “아니 살게 없어서 라다를 삽니까?”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1979년 12월 발발)으로 문을 연 1980년대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이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고, 반대로 공산진영은 LA올림픽을 보이콧하는 등 냉전양상이 극에 달했다.
캐나다 역시 자유진영에 속해있었던 만큼 공산주의를 혐오한 주유소 사장이 Made in USSR인 라다(LADA) 차량에는 휘발유를 팔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차량 정보
사진 속의 차량은 Lada Riva(VAZ 2104-2107)모델로, 캐나다에는 수입업자 데니스 시그넷(Dennis Signet)의 이름을 따 ‘라다 시그넷(Lada Signet)‘이라는 명칭으로 팔렸다.
▲ 라다 시그넷(Lada Signet)
1979년부터 캐나다에 수출을 시작한 라다는 다른 브랜드에 비해 캐나다의 거친 지형에서도 좋은 성능을 발휘했고,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해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환경문제가 대두되면서 캐나다 정부가 요구하는 배기가스 배출기준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처하다가 판매가 급감하기 시작하였고, 이 빈틈을 한국의 현대자동차가 슬금슬금 차지하게 된다.
현대자동차의 포니Ⅱ는 국내 완성차 최초로 1983년 캐나다 수출(포니Ⅱ CX)에 성공했다. 기본 모델 가격이 5,900 캐나다달러(한화 약 545만 원)였던 포니Ⅱ는 1980년대 중반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1985년에만 50,780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 캐나다 수출형 현대 포니Ⅱ CX(Canada eXport)
그렇게 밀려난 라다 차량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캐나다 대도시에서 하루 1~2대는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부분 사라졌다.
사진이 촬영된 위치
주유소의 위치는 캐나다 토론토의 스카버러(Scarborough)라는 곳으로, 보통 주유소는 세월이 흘러도 용도변경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곳도 마찬가지인지 현재도 여전히 주유소로 영업하고 있다.
▲ 최근까지도 주유소로 영업중 (2019.08)
구글 스트리트 뷰를 확인해보면 근처에 재미있는 상호들이 나오는데 주유소 부속 건물 중에는 아프가니스탄 수도명인 ‘카불 마켓(Kabul Market)‘이라는 이름의 마트가 있고, 주유소 건너편에는 ‘알 미스바 이슬람센터(Al-Misbah Islamic Centre)‘가 있다.
▲ 건물들을 통해 무슬림들이 많다는것을 짐작할 수 있다.
스카버러는 1984년 캐나다 최초의 다목적 모스크가 건립된 곳이기 때문에 그 시기에 신규 무슬림 이민자들이 스카버러 북동부에 많이 정착하였고, 현재도 스카버러 전체 인구 중 11%가 무슬림이다.(북동부로 한정하면 더 많을 것으로 예상)
이렇게 보면 단순히 반공의식으로 라다 차량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이곳에 정착한 무슬림들을 통해 이슬람 국가를 침범한 소련에 대한 조직적인 반소운동 움직임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장도 무슬림이었을 수도 있고, 무슬림이 아니라 해도 얼마되지 않는 라다 소유자들에게 휘발유를 파는 것보다는 다수의 동네주민인 무슬림들에게 잘 보이는 것이 합리적인 영업전략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