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남단 교도소, 티에라델푸에고(Tierra del Fuego)
고대국가들이 죄수를 유배 보내는 곳은 바다 건너편의 섬과 같은 사람이 살기에 몹시 척박한 곳이었다. 보통 중죄인일수록 수도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격리되었는데, 그렇게 외딴곳에 격리된 죄인들의 공허함과 박탈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런 유배지의 성격은 세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남미대륙 최남단에 있는 티에라델푸에고(Tierra del Fuego) 제도에는 남극에 가까운 ‘세계 최남단 교도소’가 존재했다.
▲ 1937년, 죄수들을 티에라델푸에고의 교도소로 호송하는 배
20세기 초, 아르헨티나는 티에라델푸에고 제도 중에서도 가장 땅끝에 위치한 섬에 교도소를 설치하고 중죄인들을 배로 실어 날랐다.
▲ 티에라델푸에고 교도소의 외관
티에라델푸에고 전체는 일 년 내내 0℃~9℃ 로 고작(?) 한국의 초겨울 날씨 정도를 나타내는 곳이지만, 교도소가 위치한 최남단 지역은 식물이 살지 못하는 아남극(亜南極) 기후로 이곳에 살게 하는 것만으로도 큰 형벌인 셈이었다.
▲ 노동을 하는 티에라델푸에고 교도소 죄수들
이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약 8,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명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일만여 년이 지난 1520년, 스페인의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에 의해서였다.
마젤란은 이 섬이 미지의 거대한 신대륙이라고 착각했다. 그는 해안가를 탐험하다가 셀크남족(Selknam) 원주민들이 피워놓은 무수한 모닥불을 보고 이곳을 ‘불(fuego)의 땅(tierra)‘이라고 불렀고 이는 오늘날 ‘Tierra del Fuego’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 셀크남족 구성원들
16세기까지 스페인 왕실의 소유였던 티에라델푸에고는 본토와의 거리로 인해 오랜 기간 관심 밖의 영토였지만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독립으로 격변의 역사를 맞게 된다.
각각 영유권을 주장하던 두나라는 1881년 섬을 반으로 나누는 조약에 서명했고(칠레 38.57%, 아르헨티나 61.43%), 1884년 10월 12일 아르헨티나의 해군 제독 아우구스토 라세레(Augusto Lasserre, 1826~1906)가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우수아이아(Ushuaia)시를 설립했다.
▲ 티에라델푸에고의 칠레와 아르헨티나 영토
이후 이곳에 진출한 목축업자들에 의해 셀크남족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목축업자들은 소규모 사설 군인들을 함께 데려왔고, 군인들이 원주민들을 사냥해 머리나 귀, 손 등을 가지고 오면 현금을 지불해 학살을 독려하였다.
▲ 셀크남족을 사냥하는 군인들
결국 유럽인들과 첫 접촉 당시 약 4천 명에 달했던 셀크남족은 1919년이 되자 279명으로 급감했고, 1945년에는 25명만이 남게 되었다.
현재 순혈의 셀크남족은 완전히 멸종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수백 명의 메스티소(유럽인과의 혼혈)가 남아있긴 하지만 학살에 대한 보상이나 사과도 요구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전통문화나 역사는 완전히 망각된 상태이다.
▲ 1899년, 셀크남족 아이들이 유럽의 악명높은 인간동물원에 실려가고 있다.
오늘날 티에라델푸에고는 학살과 유배지의 흑역사를 뒤로 하고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다. 관광객을 유혹하는 주요 문구는 역시나 ‘최남단’이며 아르헨티나 쪽의 우수아이아(Ushuaia)시나 칠레 쪽의 푸에르토윌리암스(Puerto Williams)시 모두 본인들이 ‘세계 최남단 도시’라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