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억 7천만원에 팔린 나폴레옹의 ‘데스마스크’
아래의 사진은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로 유명한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의 데스마스크(Death mask) 중 하나이다.
나폴레옹의 데스마스크는 그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세인트헬레나섬이 워낙 외딴 곳에 있었던 만큼 석고가 충분하지 않았기에 제작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원수 앙리 가티엔 베르트랑(Henri Gatien Bertrand, 1773~1844)의 아내이자, 황제를 마지막으로 모시던 베르트랑 부인(Fanny Dillon, 1785~1836)이 극구 데스마스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 나폴레옹이 숨을 거둔 롱우드 하우스(Longwood House)
나폴레옹의 데스마스크가 곧바로 만들어지지 않고, 사망 이틀 후인 1821년 5월 7일에야 제작에 들어간 이유가 바로 석고가 도착하기를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 베르트랑 부인
데스마스크 제작은 시신의 부검을 맡았던 영국 66보병연대 소속의 외과의사인 프랜시스 버튼(Francis Burton)에게 의뢰되었다.
베르트랑 부인은 영국인이 프랑스 황제의 데스마스크를 만드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더운 날씨에 시신이 부패를 시작하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자 결국 이를 수락했다.
▲ 나폴레옹의 임종 순간 ©Charles de Steuben, 1828
나폴레옹의 데스마크스 제작자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오랜 논쟁이 있다.
일반적으로 나폴레옹의 오랜 주치의이자 사망진단서를 작성한 프랑수아 카를로 안토마르키(François Carlo Antommarchi)가 데스마스크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프랜시스 버튼이 주형을 만드는 과정 이후에 합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 프랑수아 카를로 안토마르키(1780~1838)
프랜시스 버튼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안토마르키와 베르트랑 부인이 몰래 데스마스크를 빼돌렸다는 설도 있는데, 1년 후 버튼이 베르트랑 부인을 상대로 ‘데스마스크 반환 소송‘을 제기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이 유물을 놓고 속이고 빼돌리는 일련의 암투가 있긴 했던 모양이다. 그만큼 불모지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정확한 진위가 가려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다.
당시 제작된 초기 데스마스크 중 2개가 나폴레옹 측근들이 섬을 떠나기 전, 세인트헬레나의 성공회 신부인 리처드 보이스(Richard Boys)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그는 이 데스마스크를 소중히 간직하다가 각각 딸과 아들에게 유품으로 남겼다.
▲ 세인트헬레나 섬
세월이 흘러 2013년 6월 19일, 보이스 가문의 데스마스크 중 하나가 런던 나이츠브리지에서 열린 경매에서 169,250파운드(한화 약 2억 7천만 원)에 익명의 구매자에게 낙찰되었다.
출품자는 보이스 신부의 후손인 앤드류 보이스(Andrew Boys)로 알려졌으며, 그는 “이 유물이 지금까지처럼 다락방에 있는 것보다는 온전히 보존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며 경매에 내놓은 이유를 밝혔다.
▲ 나폴레옹의 ‘보이스 데스마스크’를 든 경매 관리자
당초 이 데스마스크는 4만~6만 파운드 정도에 가격이 형성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의 역사적 가치, 그리고 마지막 유배지였던 세인트헬레나와 연관된 몇 안 되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예상보다 높은 가격을 이끌어 낸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고인의 생전 모습을 남기기 위한 목적으로 사망 직후 데스마스크를 제작하는 것은 고대 이집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장례의식의 일부였다. 불과 5년 후 세계 최초의 사진이 출현한 것을 염두에 두면, 나폴레옹의 데스마스크는 오래된 전통의 마지막 끝자락에서 만들어진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관련 글: 세계 최초로 촬영된 사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