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베네치아 파벌들의 ‘다리 위의 전투’

중세 베네치아(베니스)는 행정구역을 두고 여러 파벌들이 대립했는데, 그중 가장 큰 조직은 까스뗄라니(Castellani)와 니꼴로띠(Nicolotti)였다. 이들이 서로가 장악한 구역을 빼앗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고 호시탐탐 틈을 노려 습격을 감행하는 것은 마치 누아르 영화 속 조직폭력배처럼 흔한 일이었다.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갈라진 베네치아인들은 하루하루 어디서 습격을 당할지 모르는 극한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보다는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주먹과 몽둥이로 서열과 권한을 정리하기로 결정한다.

 

조직들은 매주 일요일이나 공휴일이면 베네치아에 있는 다리에 집결해 ‘다리 위의 전투(battagliole sui ponti)’라고 불린 의식을 시작했는데, 당시의 베네치아 다리들은 난간이 없어서 상대방을 물로 던져버리기에도 용이한, 마치 싸움을 위해 만들어진 모습이었다.(베네치아의 다리에 난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세기가 되어서였다)

 

중세 베네치아(베니스)는 행정구역을 두고 여러 파벌들이 대립했는데, 그중 가장 큰 조직은 까스뗄라니(Castellani)와 니꼴로띠(Nicolotti)였다. 이들이 서로가 장악한 구역을 빼앗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고 호시탐탐 틈을 노려 습격을 감행하는 것은 마치 누아르 영화 속 조직폭력배처럼 흔한 일이었다. 1
▲ Ponte dei Pugni in Venice(1676) | 피에트로 리베리(Pietro Liberi)


전투가 시작되면 좁은 다리 면적으로 인해 사전에 준비한 작전 따위는 무용지물이었고, 대부분 근접육탄전으로 혼잡했으며 이를 틈타 예리한 흉기로 찌르는 반칙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또한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 구성원들은 지붕이나 발코니에 숨어서 구경하는 척 하다가 큼지막한 돌이나 물건을 상대방 무리의 머리 위로 던지기도 하였다.

 

중세 베네치아(베니스)는 행정구역을 두고 여러 파벌들이 대립했는데, 그중 가장 큰 조직은 까스뗄라니(Castellani)와 니꼴로띠(Nicolotti)였다. 이들이 서로가 장악한 구역을 빼앗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고 호시탐탐 틈을 노려 습격을 감행하는 것은 마치 누아르 영화 속 조직폭력배처럼 흔한 일이었다. 3
▲ Competition on the Ponte dei Pugni in Venice(1673). | 요제프 하인츠 더 엘더(Joseph Heintz the Elder)


해마다 이 싸움으로 최소 몇 명이 압사당하거나 익사하는 사례가 이어지면서 다리 위의 싸움은 흉기 사용과 반칙이 금지되는 등 문명화되기 시작하였고, 일반인들의 싸움에서 레슬러나 무도인들이 고용되어 대리로 싸우기도 하는 등 규칙이 생기면서 점점 재미(?)는 떨어져 갔다고 한다.

 

마지막 다리 위의 싸움은 1705년 9월 29일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작된 싸움이 돌연 폭동으로 변질되면서 군중들은 규칙을 잊고 흉기를 꺼내 들었고 너무 흥분한 와중에 방화까지 저질렀다.

 

이때 산 지롤라모 성당(Église San Girolamo)에도 불이 붙었는데, 시내의 소방관들까지 폭동에 참여하는 바람에 화재를 진압할 사람이 없어 건물이 전소되는 안타까운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이 사건 이후로 다리 위의 싸움은 불법화된다.

 

오늘날 다리 위의 싸움은 사라졌지만 당시의 다리들은 아직도 남아있다.

 

중세 베네치아(베니스)는 행정구역을 두고 여러 파벌들이 대립했는데, 그중 가장 큰 조직은 까스뗄라니(Castellani)와 니꼴로띠(Nicolotti)였다. 이들이 서로가 장악한 구역을 빼앗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고 호시탐탐 틈을 노려 습격을 감행하는 것은 마치 누아르 영화 속 조직폭력배처럼 흔한 일이었다. 5
▲ 폰테 데이 푸그니(Ponte dei Pugni)의 현재 모습


그중 가장 유명한 다리가 ‘폰테 데이 푸그니(Ponte dei Pugni)’로 그 의미는 ‘주먹의 다리(bridge of fists)’라는 뜻을 담고 있어 당시의 혈투 흔적을 지금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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