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한강 보트에서 사라진 기생과 남자
– 밤의 한강에서 사라진 남녀
– 보트 유람 후 돌아오지 않은 사건
한강에서 사라진 연인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 한강 인도교 아래에는 ‘뽀-트 구락부‘라는 이름의 유람용 보트를 대여해주는 업소가 영업 중이었다.
봄기운이 완연한 1934년 5월 3일 새벽 1시 30분경, ‘뽀-트 구락부’의 사장 김소봉(金小鳳)이라는 인물이 한강 파출소에 찾아와 ‘2일 오후 7시경 23~4세쯤 되는 남녀가 보트를 빌려간 후 현재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신고를 접수하였다.
보트는 날이 밝은 3일 아침에야 주인 김소봉에 의해 한강신사(漢江神社)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내부에는 사람은 없고 남자의 양복저고리와 레인코트, 여성의 핸드백만이 남아있었다.
▲ 보트가 발견된 위치(붉은 원). 현재는 한강신사 대신 효사정이 있다.
경찰은 두 가지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우선 두 사람이 무슨 이유인지 함께 생을 마감했을 가능성이었고, 또 하나는 보트가 한강신사 쪽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정박해있었기 때문에 유품을 계획적으로 남겨놓아 ‘마치 자살인 것처럼 꾸미고‘ 행방을 감추었을 상황이었다.
일단 사건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들의 신원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날 밤 보트업주 김소봉의 기억에 따르면, 여자는 서양식 헤어스타일에 연황색 저고리와 초록색 치마를 입고 에나멜 구두를 신은 모던걸이었다. 함께 온 남자는 남색 학생복에 연회색 모자를 썼고, 헤어스타일은 올백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금니가 눈에 띄었다고 한다.
말끔한 차림새의 젊은 연인이어서인지 ‘뽀-트구락부’에서는 별다른 의심 없이 검은색 구두 한 켤레와 양산하나만을 담보로 받아두었다. 그나마 발견된 보트에 있던 핸드백에서 여성의 사진이 발견된 것이 큰 단서였다.
사라진 남녀의 정체
실종된 두 남녀의 신원은 사건 발생으로부터 5일이 지난 5월 7일 11시경, 종로경찰서에 접수된 수색원(搜索願, 실종신고서) 덕분에 의외로 쉽게 파악되었다.
수색원을 제출한 것은 교남동 19번지에서 내외주점을 운영하고 있던 송정숙(52)이라는 여인으로, 사건 보도를 접하고 실종된 여성이 자신의 업소에서 일하던 기생인 것을 확신하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이었다.
▲ 한강신사 전경. 웅진강신사(熊津江神社)라고도 불렸다. 『京城繁昌記』(博文社, 1915)
송정숙은 현장을 찾은 기자에게 “한강에서 남녀가 보트를 타고 유람했다고 하여 혹시 사라진 아이(기생)가 아닌가 하고 가보았더니 보트에 있던 가방 속의 여자 사진과 양산이 그 아이의 것이 맞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죽은 것으로 위장한 다음 어딘가로 달아났다고 확신하고 경찰서에 수색원을 제출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수많은 작부들을 다루었을 술집 여사장의 촉으로는 이들이 삶을 마감했다기보다는 야반도주했을 가능성을 100%로 본 것이었다.
특히 사라진 기생은 송정숙의 업소에 온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상태였고, 함께 사라진 남자와 정분이 난지 겨우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터라 죽기까지 하겠냐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이후 경찰의 탐문에 따라 두 사람의 신원이 밝혀졌다.
▲ 실종된 오수명과 김영순
남자는 경성 현저동 46번지 603호에 사는 오춘식의 맏아들 오수명(吳壽命, 24세)으로 촌전지함소(村田紙函所, 박스공장)의 직공이었고, 여자는 경성 행촌동(杏村洞) 78번지 이명숙의 둘째 딸 김영순(金永順, 19세)이었다.
자취를 감춘 사연
실종된 김영순은 40여일 전인 3월 22일에 함경북도 웅기항(현재의 나진항) 평양루(平壤樓)에 기생으로 일하고 있던 것을 교남동 19번지 내외주점의 사장 송정숙이 343원을 주고 4년 11개월의 고용계약을 맺어 전차금(前借金)을 주고 데려왔다.
• 전차금(前借金): 근로자에게 임금을 미리 주고 데려오는 방식을 말한다. 이미 돈을 받았기 때문에 근로자는 퇴직의 자유가 없어서 구속과 착취 등의 폐해가 따른다. 또한 일반적으로 전차금에는 높은 이자가 붙기 때문에 완전한 변제가 힘든 경우가 많았다.
그로부터 한 달 만에 김영순은 업소를 찾아오던 손님 오수명과 눈이 맞아 사랑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 1930년대, 한강의 보트 유람객들
모친이 있음에도 여기저기 작부로 팔려 다니는 상황으로 볼 때 김영순이 몹시 빈한한 상황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고, 오수명 역시 일개 직공에 불과해 300여 원의 몸값을 갚아줄 재력이 없었다.(당시 대도시 교사의 한 달 월급이 70~80원 정도였기에, 지함소의 젊은 직공은 3~40원 정도의 월급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군다나 오수명은 본처까지 있는 유부남이었기에 두 사람은 경제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현실을 비관하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2일 오후 1시경, 김영순의 행촌동 모친의 집에서 식사를 한 뒤 함께 어디론가 나갔는데 이것이 가족들이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불귀의 객이 된 두 남녀
1934년 5월 8일 낮 12시경, 한강에서 낚시를 하던 노인의 낚싯대에 묵직한 무언가가 걸렸다.
낚싯줄에 걸려 떠오른 것은 허리를 끈으로 묶고 꼭 껴안고 있는 두 남녀의 시신이었다. 이들이 ‘살아서’ 어디론가 도망쳤을 것이라는 송정숙의 확신과는 달리, 도망친 것은 맞았으나 살아있는 것이 아닌 이승으로부터의 도피였다.
▲ 보트가 발견된 지점에서 본 현재의 효사정(2021년 3월)
실종되었던 남녀가 발견되었다는 통지를 받은 용산경찰서는 즉시 현장에 출동해 신원을 확인하였고, 남자 쪽의 부친인 오춘식을 불러 시신을 인도하였다. 싸늘한 시신을 접한 오춘식은 두 사람을 합장해 혼령이나마 위로하겠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집안의 생계를 위해 한 소녀가 어린 나이에 기생이 되고, 이후 헤어 나올 수 없는 전차금에 얽매여 여기저기 팔려다니다 생을 마쳐버린 시대의 어두운 모습은 변해버린 한강의 풍경과 함께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 참고문헌:
• 朝鮮日報. 死의 船遊客 正體判明 (1934.05.04)
• 每日申報. 端艇失踪의 兩男女 (1934.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