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공사가 촬영한 1880년대 후반의 조선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는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으로 1885년~1897년 사이에 초대 주한 러시아 공사로 재직한 인물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에 매료되었던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임페리얼 대학교(Saint Petersburg Imperial University) 동양학부 졸업 후 즉시 베이징에 파견되어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 체결 이후 최초의 러시아 외교관으로 한성부(서울)로 이주했다.
▲ 카를 베베르(1841~1910)와 독일 라데보일에 있는 그의 묘
베베르가 공사로 재직할 당시 고종과는 매우 친밀한 관계였던 것으로 유명한데, 외교 책임자가 자국보다 파견국으로 기우는 모습에 대해 본국인 러시아가 달가워할 리 없었다. 결국 그를 다른 국가로 파견할 것을 결정하자 고종은 1895년 7월 2일 니콜라이 2세에게 항의와 베베르에 대한 칭송을 담은 친서를 보내기까지 했다.
1896년 발생한 아관파천을 주도해 조선에 친 러시아 정권을 세우는 데 성공했으며, 러시아로 돌아갔다가 러일전쟁 직전에 다시 입국해 고종을 만나기도 했다. 조선에 대한 애정은 매우 컸던지 말년에 독일 드레스덴 근교 라데보일(Radebeul)에 ‘꼬레야(Корея)’라는 이름을 붙인 별장을 짓고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래는 그가 한국에 머물던 당시 촬영한 사진들이다.
▲ 북악산 아래 한성부(서울) 전경.
▲ 한성부(서울) 기와집 거주지의 파노라마 사진.
▲ 중심가에서 벗어난 초가집 풍경.
▲ 한성부(서울)의 파노라마 사진. 중심부에서 외곽으로 갈수록 초가집으로 바뀌는 모습이다.
▲ 카를 베베르 공사가 머물던 건물.
▲ 한옥과 서양식이 절충되어 지어진 건물로 조선 가옥에 익숙하지 않은 러시아 외교관을 위한 주택이다.
▲ 조선인 선비들과 관리들의 모습. 깔끔한 복장과 개까지 대동한 것으로 보아 촬영에 앞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찍은 모습이다.
▲ 북악산 계곡으로 추정되는 곳의 정자와 비석들.
수많은 비석들은 고을 수령들이 자신의 치적을 내세우기 위해 백성들에게 건립비를 거두어 세운 선정비였다. 학정을 상징하는 선정비가 이곳저곳에 들어서자 현종(顯宗, 1641~1674) 때는 선정비 건립 금지령도 내려질 정도였으나 고종 집권기에 급증했다.
▲ 한성부(서울)의 러시아공사관 부지에서 공사를 구경하는 조선인들.
구 러시아공사관은 조선과의 조약 체결 후 1885년에 착공하여 1890년에 완공하였으므로 1885년경에 촬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훗날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는 역사적 장소이다.
▲ 구경하는 조선인들이 서있는 위치에서 공사 중인 러시아공사관을 바라본 모습.
▲ 건축 중인 러시아공사관 건물에서 탑이 올라가고 있는 모습.
3층 전망탑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부분으로 사적 제253호로 지정되었다. 러시아 공사관의 설계는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Afanasy Ivanovich Seredin-Sabatin, 1860~1921)이 맡았으며, 그는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문을 설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 남대문(숭례문)과 성벽에 바짝 붙어있는 가옥들.
▲ 경복궁의 남쪽 정문, 광화문(光化門).
▲ 경복궁 후원에 있는 연못 향원지(香遠池) 내에 있는 향원정(香遠亭)과 취향교(醉香橋)의 모습. 고종이 부인 민씨(명성황후)를 위해 건축한 휴양지이다.
▲ 반대쪽에서 본 향원정(香遠亭)과 취향교(醉香橋).
▲ 고종(高宗, 1852~1919)과 왕세자 순종(純宗, 1874~1926)이 1888년경 함께 찍은 사진.
서울역사박물관의 설명에는 사진이 찍힌 시기를 1911년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 사진이 실린 『THE STORY OF KOREA』(T. Fisher Unwin, 1911)라는 책의 출간 시기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