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로열 웨딩’
1918년에 건국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은 1929년부터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칭되었다.
부왕 페타르 1세(Petar I Karađorđević, 1844~1921)에 이어 1921년 8월 16일 왕위에 즉위한 알렉산다르 1세 카라조지에비치(Aleksandar I Karađorđević, 1888~1934)는 즉위 이듬해 루마니아의 공주 마리야(Marija Karađorđević, 1900~1961)와 결혼하였다.
왕위에 오른 알렉산다르 1세는 헌법을 폐지하고 검열제를 갖춘 경찰국가체제를 만든다. 이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세력 사이의 분리주의 행동을 억제하고 국가의 통일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 알렉산다르 1세와 마리야 왕비
하지만 두 세력 사이의 충돌은 더욱 격렬해졌고, 1934년 10월 9일 프랑스 제3공화국과의 동맹 강화를 위해 마르세유를 방문한 알렉산다르 1세는 마케도니아의 폭력혁명주의자인 블라노 체노지미스키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 알렉산다르 1세 암살 기록영상
숨진 알렉산다르 1세의 뒤를 이어 아들 페테르 2세가 즉위했지만 곧이어 2차 대전이 발발하였고, 유고슬라비아 왕가는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전후 집권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독재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는 왕가의 귀국을 금지하고 군주제를 폐지하였으며 연방 수립과 함께 공산주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 결혼식을 올리기 직전의 마리야 공주
어린 시절 ‘미뇽(Mignon)‘으로 불렸던 마리야 왕비는 루마니아 페르디난드 1세의 딸로 유럽에서 최초로 자동차를 운전한 신여성으로도 유명하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뻘이었던 그녀는 1961년 망명생활 중이던 런던 외곽에서 생을 마감했다. 영국 왕실은 1961년 그녀의 시신을 런던 윈저성 인근 왕실 묘지에 안치하는 예우를 갖추었다. 이후 2000년, 세르비아 왕실이 상징적인 존재로 부활함에 따라 마리야 왕비의 세르비아 복귀가 추진되었다.
2013년 4월 29일, 그녀의 손자인 알렉산다르 2세 세르비아 왕세자가 시신 운구를 맡은 가운데 마리야 왕비는 60년 만에 수도 베오그라드 인근 토폴라 왕릉으로 이장되었다.
아래는 1922년 6월 8일에 거행된 유고슬라비아 왕실의 로열 웨딩을 기록한 사진이다.
▲ 식장에 도착한 영국왕실의 요트.
▲ 영국의 엘레나 공주와 앨버트 요크 공작(훗날 조지 6세).
▲ 신부의 어머니인 루마니아의 마리 왕비와 마리야 공주.
▲ 선왕 페르디난드 1세(좌), 결혼식의 주인공 알렉산다르 1세(우).
▲ 군악대의 행렬.
▲ 왕을 기다리는 군중.
▲ 마차에서 내리는 마리야 공주.
▲ 왕을 기다리는 사제들.
▲ 페르디난드 1세와 마리야 공주.
▲ 결혼식이 진행되는 성당 내부.
▲ 식장에서 퇴장하는 국왕 알렉산다르 1세와 왕비.
▲ 성당을 나온 국왕 내외.
▲ 세르비아 정교회 사제들.
▲ 결혼식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온 알렉산다르 1세와 왕비.
▲ 발코니에 나온 국왕 내외.
▲ 전통의상을 입은 세르비아 여성들.
▲ 세르비아 전통복장을 입은 남자.
▲ 축제를 벌이는 시민들.
▲ 전통복장을 입은 세르비아 농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