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초의 여성마라토너, 캐서린 스위처(Kathrine Switzer)
마라톤의 기원
마라톤이라 불리는 장거리 달리기 종목은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인 기원전 490년,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에서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라는 전령이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40km나 되는 거리를 달려 승전보를 전하고 전사했다는 전설에서 시작되었다.
▲ 그리스의 전령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제1회 올림픽부터 정식종목이 된 마라톤의 우승자는 당시에는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여타 종목들의 우승자들과는 그 격이 달랐다고 한다.
현재는 당시만큼 엄청난 시청률과 인기를 자랑하는 스포츠는 아니지만, 올림픽 대회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상징적인 스포츠인 것은 여전하다.
▲ 제 1회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스피리돈 루이스(spiros louis, 1873~1940)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마라톤이지만, 여성이 공식적으로 마라톤 경기에 참가할 수 있게 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여성은 애초에 신체적으로 40km를 달릴 수 있게 만들어지지 않았고, 마라톤 같은 운동은 생식기관에 심각한 이상을 초래할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지만 고대 전쟁을 상징하는 스포츠인만큼 남성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도 작용하고 있었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나가고 싶어요”
보스턴 마라톤 대회는 매년 4월의 세 번째 월요일에 개최하는 대회로, 스포츠를 넘어 1897년 미국 독립전쟁을 기념하는 매사추세츠 주의 전통적인 축제로 알려져 있다.
▲ 150주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당시 시러큐스(syracuse) 대학의 학생이었던 캐서린 스위처(Kathrine Switzer)는 1966년, 학교 신문에 기사를 쓰기 위해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취재하다가 ‘번외 코스’ 즉, 비공식적으로 대회에 참가한 여성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로베르타 깁(Roberta gibb)’이라는 한 여성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바비 깁(Bobbi gibb)’이라는 가명으로 접수를 했으며, 가발을 쓰고 스웨터를 껴입은 다음 남성 마라토너들이 모두 출발한 뒤 나무 뒤에 숨어있다가 뒤늦게 출발했다는 것이다.
▲ 로베르타 깁(Roberta gibb)
스위처는 그녀의 열정이 담긴 일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심정을 느끼게 된다.
이후 대학의 크로스컨트리(cross-country)팀에 가입하지만 팀원들은 모두 그녀가 치어리더로 가입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위처는 훈련에 엄청난 열의를 보였고, 결국 팀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함께 훈련을 허용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훗날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인생에서 부모님 외에 가장 영향력을 준’ 어니 브릭스(Arnie Briggs) 코치를 만나게 된다.
▲ 과거의 여성 마라토너들
어느 날 스위처는 브릭스 코치에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고 싶어요” 라고 말한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여자는 못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스위처의 끈질긴 집념에 코치는 최후의 제안을 하였다. ‘42.195km의 풀코스를 뛴다면 보스턴에 데려가겠다‘라고. 이에 그녀는 42km에 8km를 더해 총 50km를 뛰며 ‘여자도 뛸 수 있다‘ 라는 것을 증명해 내고야 말았다.
세상을 바꾼 사진
과거 보스턴 마라톤대회의 참가 신청서에는 성별 기입란이 없었다.
미국 아마추어 체육연합(AAU)의 규칙에는 여성의 경기 참가에 대한 특별한 제제 항목이 없었는데, 이는 ‘당연히 여성은 참가할 일이 없을 테니’ 서류에 인쇄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 레이스를 시작한 캐서린 스위처
1967년, 캐서린 스위처는 ‘KV 스위처’라는 이름으로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신청을 하였다. 얼핏 남자 이름처럼 느껴졌기에 서류접수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번호표는 코치가 대신 받아왔다.
그녀가 출발선에 서자 주변의 남자들이 술렁거렸다. 스위처는 머리도 길었고 귀걸이도 착용했으며, 남자로 보이기 위해 어떤 변장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몇 Km쯤 달렸을 때 드디어 기자들이 눈치를 챘고, 언론사의 트럭들이 그녀의 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레이스 감독관 작 샘플(Jock sample)은 그녀를 쫓아가며 이렇게 외쳤다.
“Get the hell out of my race and give me that race number!”
(번호표 내놓고 당장 레이스에서 꺼져!)
당시 48kg으로 매우 가벼웠던 스위처는 샘플에게 상의를 잡혔을 때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때, 남자친구 토마스 밀러가 어깨로 감독관을 밀어서 날려버리고 그녀를 향해 외쳤다.
“Run like hell!!”
(힘껏 뛰어!)
마치 스위처뿐만이 아닌 모든 여성들에게 외치는 말처럼.
▲ 라이프(LIFE)가 선정한 ‘세상을 바꾼 100장의 사진’ 중의 하나인 바로 그 장면
그녀는 살아오면서 여성차별을 전혀 체감하지 못했고 여성운동을 들여다 본적도 없었지만, 그 순간 완주하지 못하면 ‘역시 여성은 할 수 없다’ 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것이라는 오기로 끝까지 달렸다. 결국 완주에 성공했지만 여러 가지 혼잡한 상황 때문인지 그녀의 기록은 4시간 20분에 그쳤다.
이후 그녀는 1974년 뉴욕 마라톤에서 우승하고 1975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51분 37초(당시 세계 6번째 기록)까지 기록을 단축하지만, 가장 큰 감동과 파장을 일으켰던 것은 바로 그날의 ‘4시간 20분의 레이스’였다.
▲ 1975년 4월 9일, 마라토너로 활약하던 캐서린 스위처
논란의 보스턴 마라톤 대회가 끝난 후, 스위처는 규정에 의해 실격되었다. (여성에게 금지된 코스 참가, 완주, 제3자의 도움)
또한 AAU도 여성의 공식경기 난입사건이 발생하자, 곧바로 남자 선수들의 마라톤 경기에 여성의 참가를 금지하는 규정을 삽입하였다.
‘여성의 첫 공식 대회 참가’라는 선례를 막아야 했던 보스턴 마라톤 조직위원회 측은 ‘가명을 사용한 부정 참가’라고 악착같이 주장했지만, ‘KV Switzer’ 라는 서명은 기자로도 활동하던 그녀가 평소에도 사용하던 필명이었기에 ‘최초의 공식대회에 참가한 여성 마라토너’로 인정받게 되었다. (작가가 꿈이었던 스위처는 TS Eliot, JD Sallinger 같은 유명 작가들을 따라하였다고 한다)
※ 위에 나왔던 로베르타 깁스 외에도 메리 레퍼(mary lepper) 바이올렛 퍼시(Violet percy), 밀드레드 샘슨(Mildred Sampson) 같은 캐서린 스위처 이전의 여성 마라토너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가명을 사용하거나 혹은 변장하는 경우 때문에 공식적인 참가로 인정받지 못했고, 남성 마라토너들보다 1시간 이상 떨어지는 기록 때문에 되려 ‘역시 여성에게 마라톤은 위험하다’ 라는 증명자료가 되고 있던 시대였다. 캐서린 스위처 역시 보스턴에서의 기록은 좋지 않았지만, 사진의 힘이 그녀를 선구자로 만든 셈이다.
▲ 운명의 사진 앞에 선 캐서린 스위처
이후 그녀는 뮌헨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그리스 육상연맹에 청원하지만 거부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진이 남긴 파장은 너무나 커서 이 논란은 순식간에 국제적으로 확대되었고, 여성 인권 운동가들의 자극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1972년에 여성 마라톤은 공식 경쟁부문으로 생겨났고, 1984년 LA 올림픽부터 정식종목으로 자리 잡았다.
▲ 1973년, 공식적으로 참가한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작 샘플과도 화해했다.
캐서린 스위처가 도전했던 보스턴 마라톤 대회는 오늘날 11,000명 이상의 여성들이 참가해서 경쟁하고 있으며, ‘스위처’라는 이름은 보스턴 마라톤 대회와 올림픽에 여성마라톤을 만들어낸 원동력으로 기억되고 있다.
▲ 여성 마라톤의 선구자가 된 캐서린 스위처
“저는 운이 좋았어요. 부모님과 코치님은 항상 인형놀이나 치어리더가 아닌 직접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하셨죠. 물론 인형놀이나 예쁜 옷도 좋아하지만 난 등산이나 스포츠를 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어요.”
“보스턴에서의 경험 후, ‘할 수 있다’라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자란 여성들이 수백만 명이 넘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건 자신을 믿고 한 단계씩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였습니다.“
캐서린 스위처는 이후에도 꾸준히 마라톤 풀코스를 뛰어왔다. 그리고 70세가 된 2017년, 자신이 세상을 바꾼 해의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다시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보스턴 마라톤 조직위원회는 그녀를 레이스에서 밀어내는 대신, 이번에는 캐서린 스위처의 배번 261번을 영구결번으로 남기며 그녀의 도전에 화답했다.
▲ 2017년 보스턴 마라톤의 캐서린 스위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