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 [86] 박춘재(朴春載)
금부후동(禁府后洞)에서 성장하여 유치한 시대부터 신문의 풍류랑을 쫓아다니며 노래와 음률을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일취월장하여 그 형세를 막지능어로다.
15세가 되던 해에 전 한국정부(대한제국) 시대에 가무별감 중에 일등으로 한참 호강을 하였을 뿐 아니라 상총이 지극하였으며, 위인이 또한 염결하고 정직하여 음란함과 사치함과 탐욕하는 마음이 없고, 다만 자기의 장기 하나를 일심으로 연구한 결과로 지금에 이르러는 조선에서 제일가는 명창의 이름을 듣고 또한 경향에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그러므로 인하여 유성기에 조선악보를 누가 넣었는고.
모두가 명창 박춘재의 목청으로 나온 소리이니 조선 가곡의 대표자라 하여도 가하리로다.
▲ 박춘재(朴春載)
조선 내의 가곡이라 하는 것은 못하는 것이 없는 고로 이곳에 열거하기에는 지면이 좁아 못하겠으나,
위인이 절등하고 행동이 단정함이 일찍이 화류계에서 보지 못한 바이라 하겠으며,
지금은 32세 춘광에 명창기생 연옥(예단일백인 [41])이와 오궁동에서 즐거이 지낸다 하니, 명창 남녀가 함께 모여 가위 겯고틀고 재미가 그 속에 있으리라 하노라.
【매일신보 1914.5.17.】
– 금부후동(禁府后洞): 종로구 청진동, 공평동, 견지동에 걸쳐 있던 마을. 의금부(義禁府)의 뒤에 있던데서 유래
– 유치(幼齒): 어린 나이
– 풍류랑(風流郞):풍치가 있고 멋진 젊은 남자
– 막지능어(莫之能禦): 막을 자가 없다는 뜻
– 가무별감(歌舞別監): 궁중의 가무를 맡아보던 벼슬로 임금을 위하여 음악을 연주하였다.
– 상총(上寵):임금의 총애
– 염결(廉潔): 청렴하고 결백함
– 경향(京鄕):서울과 시골을 아울러 이르는 말. 전국
– 유성기(留聲機): 축음기(蓄音機)의 초기 이름
– 가하다(可하다): 옳다. 마땅하다.
– 절등(絕等): 아주 두드러지게 뛰어남
– 춘광(春光): 젊은 사람의 나이를 문어적으로 이르는 말
– 오궁동(五宮洞): 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동·신문로2가동에 걸쳐 있던 마을
– 가위(可謂): 참으로
– 겯고틀다: 시비나 승부를 다툴 때에, 서로 지지 않으려고 버티어 겨루다.
●매일신보에서는 100명의 예술인을 대상으로 기사를 연재했는데, 이 기사의 제목을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이라 하였다.
명창 박춘재의 몰락과 부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박춘재지만 생년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자료에 따라 1881년이나 1883년 또는 1877년 등 각양각색인데, 1914년에 작성된 예단일백인에서는 32세, 즉 1881년생으로 나이를 밝힌 셈이다. 하지만 예단일백인 [83] 편의 기생 진홍(眞紅)처럼 당시도 현대의 연예인과 같이 나이를 줄여서 말하는 경우가 있어서 구술에 따른 생년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그가 1920년대에 들어 경찰서 유치장을 들락거리는 자료가 나온다.
– 경찰부 유치장에, 일류 명창 박춘재
– 풍류남아로 이름 높던 그가 어찌하여 유치장에 갔나
조선 일류의 명창으로 일시 고종태황제의 많은 총애와 세도대가의 귀염과 풍류남아의 칭찬과 화류 춘풍 미인들의 흠모를 더할 수 없이 받던 박춘재(46)는 수일 전에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갇혀 신음하게 되었다.
(중략)
사람을 능히 웃기고 호걸 기풍이 농후하고 동탕한 그 용모는 수많은 미인들의 간장을 녹였었다. 당시 어떤 기생은 박춘재를 위하여 자기의 전재산을 희생한 일까지 있었다 한다.
추월춘풍에 턱을 괴이고 군소리하며 한숨 쉬는 수많은 미인들이 박춘재를 사귀고자 서로 다투는 통에 그는 어깨가 으쓱으쓱 올라갔었다. 그러나 그 반면에는 자연 타락의 무서운 구렁으로 빠져들어가서 마침내 ‘모루히네(모르핀)’ 침까지 맞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그 중독이 골수에 깊이 잠겨서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신음하다가 그는 무슨 생각을 하였던지 수년 전에 조선을 떠나서 러시아와 중국 방면으로 나다니며 방황하다가 얼마 전에 다시 돌아왔었다. 그러나 속 깊이 든 모르핀 중독은 그로 하여금 견디기 어렵게 하였다.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고 모히침을 맞아가며 살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죽게 된 그 와중에도 선후책을 강구하기에 최근 얼마 동안 더욱 고민하였다 한다. 앞뒤가 꼭 맞혀서 어쩔 수 없이 된 그는 아무리 선후책을 강구하였으나 별로 신기한 묘책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생각다 못해 굳은 결심으로 수일 전에 경기도 경찰부에 가서 모히중독 떼어주기를 자원하여 그와 같이 유치장 속에서 신음하면서 옛날 가진 호강과 귀염을 받으며 화류춘풍 미인들이 서로 다투어 따르던 과거의 역사를 눈물겹게 꿈꾸고 있는 것이다.
뼛속 깊이 사무친 중독으로 용모가 다소 초췌하여졌으나 그래도 그 동탕하고 아름다운 얼굴의 견양은 의연히 남아 사람의 마음을 끈다. 그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노래를 유성기에 넣은 사람이었다 한다.
【조선일보 1925.10.20.】
1910년대~1920년대 초반까지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그의 시대가 저물자 허망한 마음에 약에 손을 댄 것인지, 혹은 당시 유행하던 마약의 유혹에 빠져든 것이 인기 몰락의 주요 원인인 것인지 선후관계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예단일백인 속의「위인이 또한 염결하고 정직하여 음란함과 사치함과 탐욕하는 마음이 없고」라는 부분의 인물 평가 답지 않은 추락은 너무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스스로 모르핀 중독에서 벗어나길 너무도 원해 경찰서에 자수를 하기까지에 이르는 것을 보면 인간적 연민이 느껴진다.
여기서 그의 나이가 46세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1879년 혹은 1878년생임을 의미한다. 구술보다는 경찰서 기록이 실제 호적상 나이 기록에 더 가까울 것이다.
박춘재는 이렇게 자수를 했음에도 안타깝게도 중독을 벗어나지 못했고, 얼마 후 아편굴에 있다가 다시 체포된다.
– 명창 박춘재의 말로, 모히주사놓다 구류, 인천서에 갇혀 있다.
목하 인천에서 흥행 중인 구극 광월단 일행에 따라다니는 경성부 황금정 사정목 13번지 박춘재(49)는 재작(再昨) 11일 밤에 인천 화정 모히굴에서 모히 주사를 하다가 인천경찰서에게 검거되어 12일 아침 구류 5일의 처분을 받았는 바.
당자야말로 한때는 조선 굴지의 일류 명창으로 그의 청아한 가곡은 아직도 축음기 레코드에 남아있어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는 「소리 잘하는 박춘재」 그 사람으로 설명되나 마(痲)주사에 빠진 것을 보면 아직도 옛적의 영화를 꿈꾸는 모양인데 구류 5일의 즉결처분을 받자 ‘나는 매독에 걸린 지 5년이나 되어 몸이 썩어가는 중인데 유치장에 넣으면 어찌하겠는가’라고 부르짖는 모양은 애처로운 장면이었는데..
그가 매독에 감염되기는 평양에 갔을 적에 자기 소리에 반한 어떤 평양기생의 유인으로 그리 된 것이라고 하더라는데 비참한 예술가의 말로라 하겠더라.
【매일신보 1926.10.13.】
해를 넘겨 인천 아편굴에서 체포된 박춘재의 나이가 이번엔 49세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1876년 혹은 1877년생이라는 뜻으로, 조선일보 기사의 나이와 몇 해의 차이가 있지만 활동 시에는 나이를 몇 살 줄였을 것이라는 추정에 확신을 더해준다.
이후 그는 1938년 조선특산품 전람회를 통해 무대에 복귀하게 되는데 관련기사에 「70 고령이 되어감에도 불구하고」라는 수식어가 있다.
1881년이나 1883년생이라면 아직 50대인데, ’70을 바라본다’는 문장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니 그렇다면 그의 나이는 최소 1876년생 이상일 것이다.
▲ 노년의 박춘재【조선일보 1938.4.21.】
어쨌든 명창 박춘재는 허망하게 사라지지 않았고, 무려 11년 만에 무대로 복귀를 하는 모습을 자료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세상을 휘어잡았던 재담꾼이 갈데없는 밑바닥까지 추락했다가 다시 무대로 올라오는 것은 어쩌면 성공보다도 더욱 힘든 역경일 수 있다. 박춘재의 무대에 대한 사랑과 의지, 자긍심이 그를 마지막 무대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 박춘재 재담
재담계의 원로인 박춘재 씨가 70 고령이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이번 대회에 나와서 생전 최후의 재담을 하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나오게 되었다.
옛날 박춘재 씨의 재담을 듣던 분이나 아직 들어보지 못한 분에게도 다 같이 감격될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 박춘재의 재담공연모습【조선일보 1938.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