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축년 대홍수와 1926년의 설날 풍경
비운의 해, 1925년
1925년 을축년(乙丑年)은 ‘액년(厄年)‘이라 불리며 조선인들에게는 나쁜 의미로 잊지 못할 한 해였다.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의 영향으로 그해 1925년 7월부터 9월까지 이어진 네 차례의 홍수는 사망자 647명과 재산 피해액만 해도 1억 300만 원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그해 조선총독부 예산 1억 7200만 원의 60%에 가까운 막대한 금액이었다.
아래의 기사는 좋지 않은 일이 많았던 1925년을 보내고 새해를 맞는 1926년의 풍경과, 고향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명절에도 문을 연 떡국가게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 지방학생 위해 떡국집은 개점
– 섣달 대목부터 농후하던 설기분
– 지방학생을 위하여 떡국을 팔아
– 근래에 드문 농후한 설기분
어제 13일은 어린아이들이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음력 정월 초하룻날이었다.
이에 울긋불긋한 새 옷을 입은 아이들이 여러 날 어머니를 졸라서 준비하여 얻은 고운 신에 고운 댕기를 드리우고 여러 가지 놀잇감을 가지고 떼를 지어 세배 다니며 이집저집에서 얻은 세뱃돈으로 서로 다투어 색다른 놀잇감들을 사면서 즐기며 어여쁜 아가씨들이 ‘널’을 뛰자고 준비에 바쁘다.
또 선술집, 설렁탕집 등 음식점과 잡화상, 안경점, 금은방들은 모두 문을 닫았으나 오늘도 한몫 보는 날이라 하여 고무신 가게, 포목상 등은 문을 열고 아직 준비 못한 손님을 기다리고 있고, 그중에도 설 명절에는 집집마다 먹는 ‘떡국’을 팔겠다고 떡국집에서는 문을 열고 있다.
정월 초하룻날 다들 집에서 먹는 떡국이 팔릴까 싶어 화동(花洞) 어떤 떡국집 주인에게 물어보았더니,
“서울에 집이 있는 사람이야 누가 오늘 같은 날 떡국을 못 먹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떡국을 먹지 못하면 까닭 없이 섭섭하다며 부모를 떠나 시골에서 올라온 학생들의 주문이 하도 많기에 이렇게 문을 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 아닙니까. 하숙집에서 떡국까지 끓여주는 집이 어디 흔합니까..” 라며 말을 한다.
북촌이 이렇게 활기를 띄는 반면 일본사람이 많이 사는 남부 일대는 명절이란 기분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아 문을 열고 회사마다 사무를 보며 나막신 신은 학생들이 학교 시간을 맞추느라고 숨이 턱에 닿도록 달음질을 한다.
【동아일보 1926.02.14】
아래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입혔던 홍수 중 하나인 을축년(1925년) 대홍수 당시의 모습이다.
▲ 왕십리역 앞 침수가옥 【조선일보 1925.07.13】
▲ 황폐한 청량리 민가 【동아일보 1925.07.24】
▲ 피난가는 마포 주민 【조선일보 1925.07.12】
▲ 두번째 수재당한 이촌동 【조선일보 1925.07.18】
▲ 신용산까지 덮은 홍수 【동아일보 1925.07.19】
▲ 제방이 파괴된 한강철교 【조선일보 1925.07.21】
당시의 처참함은 피해주민들이 재해에 대한 경각심을 후세에 일깨우고자 1926년 7월 15일 광주군 중대면사무소에 남긴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로 지금까지 전해져 올 정도로 한반도 역사상 한강유역에서 발생한 가장 큰 홍수로 남아있다.
이후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는 두 차례 이전되어 2009년 이후로는 송파구 여성문화회관 옆 근린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
이처럼 1925년의 재난이 너무 컸기 때문에 1926년 구정(舊正)은 액년을 보내고 다음 해인 병인년에 새로운 희망을 얻고자 하는 기대 때문인지 전례에 없이 활기를 띄는 설날이었다고 한다.
Reference:
– 동아일보. 지역학생위해 떡국집은 개점(1926.02.14.)
– 동아일보. 督府明年豫算 (1924.12.17.)
– 네이버지도.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