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1960년, 북한 평양

한국전쟁 후 7년이 흐른 1960년을 전후한 북한의 사정은 남한보다 훨씬 나았다. 일제시대에는 발전소와 공장 등의 인프라가 현재의 북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고, 전후에는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한 구소련과 중공의 지원이 북한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 따르면 1961년의 1인당 GDP는 북한이 320$, 한국이 82$였다.

 

한국전쟁 후 7년이 흐른 1960년을 전후한 북한의 사정은 남한보다 훨씬 나았다. 일제시대에는 발전소와 공장 등의 인프라가 현재의 북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고, 전후에는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한 구소련과 중공의 지원이 북한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1
▲ 1959년, 김일성 종합대학.

 

김일성 종합대학은 1946년 10월에 문을 연 곳으로, 대부분의 건물들은 농가의 현물을 기부받아 건설되었다. 사진 속에 보이는 건물은 2009년에 철거되었다. 대학생들이 동복으로 보이는 교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독특하다.

 

한국전쟁 후 7년이 흐른 1960년을 전후한 북한의 사정은 남한보다 훨씬 나았다. 일제시대에는 발전소와 공장 등의 인프라가 현재의 북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고, 전후에는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한 구소련과 중공의 지원이 북한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3
▲ 1959년, 평양 스탈린 거리(현재의 승리거리).


​평양 제일백화점에서 바라본 스탈린 거리(승리거리)의 모습. 소련제 자동차들로 거리가 가득한 와중에 북한이 자체 생산한 유모차가 독특하다. 뒤쪽에 보이는 건물들은 가장 오른편에 있는 ‘대동문 영화관’외에는 현재 모두 사라졌다. (관련 글: 1959년, 승리거리)

 

한국전쟁 후 7년이 흐른 1960년을 전후한 북한의 사정은 남한보다 훨씬 나았다. 일제시대에는 발전소와 공장 등의 인프라가 현재의 북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고, 전후에는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한 구소련과 중공의 지원이 북한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5
▲ 1959년, 조중우의탑(朝中友誼搭).

 

조중우의탑(朝中友誼搭)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우의를 상징하는 탑으로 1959년 10월 25일에 건립되었으며, 1984년 10월 25일 개축되었다. ’10월 25일’은 중공의 625참전기념일을 의미하는데, 탑의 건축자재도 이 숫자를 의미하는 1,025개의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지어졌다. 높이는 30m이며 주변 면적은 12만㎡에 달한다.

 

한국전쟁 후 7년이 흐른 1960년을 전후한 북한의 사정은 남한보다 훨씬 나았다. 일제시대에는 발전소와 공장 등의 인프라가 현재의 북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고, 전후에는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한 구소련과 중공의 지원이 북한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7
▲ 1959년, 조선인민군 추모탑.

 

조선인민군 추모탑은 1959년에 건립된 군인들을 위한 추모탑. 1993년 7월 26일,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탑이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동반한 제막식을 갖고 공개되면서 공산당 프로파간다에 어울리지 않는 이 소박한(?) 추모탑은 철거되었다.

 

한국전쟁 후 7년이 흐른 1960년을 전후한 북한의 사정은 남한보다 훨씬 나았다. 일제시대에는 발전소와 공장 등의 인프라가 현재의 북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고, 전후에는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한 구소련과 중공의 지원이 북한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9
▲ 1959년, 국립중앙해방투쟁박물관.

 

1948년에 설립된 박물관이지만 공산당들의 프로파간다 욕심을 채워주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았다. 1960년에 조선혁명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1961년 1월에 김일성광장 동쪽에 새로 지은 건물(현재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로 이관하였다가 1972년에 또 한 번 만수대 언덕의 김일성 동상 뒤편에 있는 현재의 건물로 옮겼다. 사진 속의 건물은 현재 ‘김성주 소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전쟁 후 7년이 흐른 1960년을 전후한 북한의 사정은 남한보다 훨씬 나았다. 일제시대에는 발전소와 공장 등의 인프라가 현재의 북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고, 전후에는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한 구소련과 중공의 지원이 북한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11
▲ 1960년, 평양호텔(현재의 대동강여관).

 

평양호텔은 외국인들을 위한 호텔로 1956년에 개관하였다. ‘호텔’이라는 명칭을 분단 직후에는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국제여관’이라고 불렀다. 이후 평양호텔이라는 이름을 거쳐 ‘대동강여관’으로 바뀌었다. 투숙객의 대부분이 러시아인이어서 당시에는 ‘러시아호텔’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평양 최초의 호텔이라는 역사적 가치가 있었으나 1999년에 전기요를 부주의하게 관리한 종업원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해 소실되었다.(목조건물이었음)

 

한국전쟁 후 7년이 흐른 1960년을 전후한 북한의 사정은 남한보다 훨씬 나았다. 일제시대에는 발전소와 공장 등의 인프라가 현재의 북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고, 전후에는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한 구소련과 중공의 지원이 북한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13
▲ 1960년, 대동문 영화관.

 

대동문 영화관은 1955년 12월 29일에 개관하였으며 현재까지 증개축을 통해 유지되고 있다. 김일성이 직접 이름을 지어서인지 명칭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건물의 형태도 살려가며 현대적으로 개조하고 있다. 전형적인 스탈린 건축스타일의 건물이다.

 

한국전쟁 후 7년이 흐른 1960년을 전후한 북한의 사정은 남한보다 훨씬 나았다. 일제시대에는 발전소와 공장 등의 인프라가 현재의 북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고, 전후에는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한 구소련과 중공의 지원이 북한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15
▲ 1960년, 스탈린거리

 

한국전쟁 후 7년이 흐른 1960년을 전후한 북한의 사정은 남한보다 훨씬 나았다. 일제시대에는 발전소와 공장 등의 인프라가 현재의 북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고, 전후에는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한 구소련과 중공의 지원이 북한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17
▲ 1960년, 스탈린거리의 일부.

 

스탈린 거리(승리거리)의 또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모습. 평양 대극장 쪽에서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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