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신축된 동래읍사무소와 부산의 발전상

1933년 12월 4일, 이날은 신축된 동래읍사무소가 업무를 시작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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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축된 동래읍사무소

 

기존의 동래읍사무소는 대한제국 시대부터 사용된 뒷골목의 연립주택이었으나, 일대의 인구가 점점 불어나면서 업무를 처리 못 할 지경이 되었다. 결국 1933년 8월 5일, 공사입찰을 통해 마산을 기반으로 하는 건축업체 치토세쿠미(千歲組)에 낙찰되며 공사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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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사중인 동래읍사무소(1933.10.)

 

건축사 치토세쿠미의 사장 치토세 키다키치(千歲定吉)는 동래 읍사무소 뿐만 부산 서구 충무동 경남도수산시험장,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 부산제6공립심상소학교(현 토성초등학교), 진주 자혜병원(구 진주의료원), 부산부 청사 등 현재 부산지역의 각종 도로 및 인프라를 다수 건설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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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토세 키다키치(千歲定吉, 1867~?)

 

새로운 동래읍사무소의 이전위치는 범어사 동래포교당(현 부산 법륜사) 근처의 사거리로 결정되었고, 공사예산은 약 14,000원으로 책정되었으며 철근콘크리트 2층 건물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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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법륜사 대웅전


당시만 해도 일대가 시골이었을 풍경 속에서 동래읍사무소는 가장 크고 현대적인 건물로 시선을 끌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1933년 10월 17일 오후 3시에 낙성식을, 1933년 12월 3일 이전식을 거행하고 다음 날부터 집무에 들어갔다.

 

현재 이 건물이 있었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이 일대는 지금도 근대건축물들이 많이 남아있으므로 존재하고 있을 확률도 있지만, 그렇다해도 원래 외관과는 다른 모습으로 개조하였다면 알아보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1963년에 동래구청을 건립하면서 협소한 규모의 동래읍사무소는 철거되었을 확률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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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읍사무소에서 열린 경남북 읍장회의(1933년)

 

이때만 해도 동래읍은 부산과 별개의 행정구역이었다.

 

개항당시만 해도 대청동, 동광동, 중앙동, 초량동 등 일본인 상업지구였던 84㎢ 정도만을 ‘부산’으로 통칭하였으며, 이후 1914년 동래군에서 부산부(釜山府)로 분리되면서 대신동, 영도, 부산진 일대가 합병되었다.

 

1936년에는 1차 시역확장으로 서면 일대가 편입되어 112.23㎢로 늘어났으며, 1942년 제2차 시역확장으로 동래읍 일원과 수영, 사하지구가 편입되어 241㎢로, 1963년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북면, 미포, 사상지구가 다시 편입되어 373㎢로 확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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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토세쿠미가 건축한 부산 서구 충무동 경남도수산시험장(1926년)


부산의 인구도 시역확장과 함께 늘어났다. 개항 당시의 부산 인구는 부산과 동래를 합해 약 4만 명에 불과했으나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에는 99,833명으로 늘어났고, 해방 직전인 1944년에는 32만 8천 명에 달했다.

 

이후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몰려든 피난민으로 인구는 더욱 늘어나 1951년에는 84만 4134명, 1975년에는 245만 4,051명까지 불어났다. (2022년 인구: 331만 7,81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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