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미제라블’속 19세기 파리의 모습

불행했던 여성들

 

파리 여성들에게는 직업선택의 자유가 없었다.

 

대부분은 영화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 2012) 속 배경처럼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거나 세탁업에 종사했으며, 이런 허드렛일이라도 구하지 못하면 매춘을 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매춘부들은 주변의 싸늘한 시선에 시달려야 했으며 경찰의 단속으로 고통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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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팡틴(Fantine)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 2012)

 

하지만 무고한 여성들이 잘못된 고발로 말미암아 매춘부로 몰려 감옥에 가는 일도 적지 않았다. 당시 파리의 전체 범죄자 중 무려 26.5%가 매춘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그중 실제로 매춘에 종사한 여성은 3분의 1에 해당하는 8% 정도였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19세기의 프랑스 경찰은 하층민과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으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난한 여성들의 진짜 사정 따위는 제대로 살펴볼 필요도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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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춘부로 전락한 팡틴(Fantine)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 2012)

 

구걸하는 아이들

 

파리 시내는 버려진 아이들로 득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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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의 노숙아동 ‘가브로슈(Gavroche)’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 2012)


운이 좋은 아이들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이나 자선 종교단체에 성인이 될 때까지 머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고아원에 간 
‘행운의 아이들’ 도 옷과 먹을 것과 잠잘 곳만을 제공받았을 뿐, 어떠한 교육 혜택도 제공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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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으로 보내지는 모습을 그린 ‘Le Depart de la Nourrice(1780)’ ©Jean-Baptiste Blaise Simonet

 

이 시기를 다룬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수녀원 앞에 아기를 버리고 가는 경우’가 현실에서 다반사였고, 가난한 집은 입을 줄이기 위해 농장에 아이를 맡겼으며, 요즘 같으면 어리광을 피울 나이에 아이들은 공장이나 농장에서 학대받으며 일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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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나르디에 부부에게 맡겨진 팡틴의 딸 ‘코제트(Cosette)’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 2012)

 

아주 가난한 부모가 병원에서 출산을 하는 경우는 아예 경찰이나 고아원에서 출산하는 즉시 자녀포기각서에 서명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나마 이런 실낱같은 행운에도 선택되지 못한 대부분의 불행한 아이들은 거리에서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구걸이나 도둑질로 거리의 부랑아가 된 아이들이 파리 시내에는 넘쳐났다.

 

남자라고 좋을 건 없었다


19세기 초, 파리의 하층 남성들은 대부분 광산이나 제조업, 항만 부두 등에서 단순노동에 종사했다. 이 하층 구조도 여러 단계로 분류되어 고도로 숙련된 기술을 가진 장인과 그 아래의 숙련된 노동자, 그리고 허드렛일을 하는 보조 노동자로 나뉘었다.

 

당시 프랑스 인구의 하위 30%는 국가 소득의 10% 이하 만을 소유하였으며, 노동 계급의 구성원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거나 자녀들에게 해줄 수도 없었다. 전형적인 가난의 대물림이 이루어졌고 정치적 고려에서도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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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소에서 노역하는 장발장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 2012)


이런 환경 속에서 파리 남성들은 도시로 몰려오는 지방의 남성들과도 경쟁해야 했으며 결국 비위생적인 노동조건과 알코올중독, 음주 후 이어지는 싸움과 작업 중 안전사고, 사고 후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은 높은 사망률로 이어졌다.

 

많은 젊은이들은 군대로 강제 입대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군대의 낮은 임금과 사회와는 다른 엄격한 군대식 문화에 길들여진 남성들은 사회부적응으로 제대 후 결혼하기도 힘들었다.

 

열악한 생활환경

 

19세기 파리 중심부의 빈민층은 방 1칸짜리 주택에 6인에서 10인 가족이 머물렀다.

 

실내 배관과 난방이 설치되지 않았으며 옥탑방은 수압이 약해 물이 꼭대기까지 올라오지 않았다. 가까이에는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에 악취와 하수도 냄새가 곧 집의 냄새였다. 배설물들은 농민에게 비료로 판매하기 위하여 집 내부에 보관되었다.

 

당시 파리의 거리에서 부자와 빈민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쉬웠다. ‘몸에 깊숙이 밴 악취가 나느냐 아니냐‘ 만으로 신분확인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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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파리의 옥탑방 ©Le Petit Journal(1898)

 

파리 외곽이라고 나을 것은 없었다. 사람들은 가축과 한집을 사용했으며 드나드는 입구도 함께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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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농가 ©Charles Ransonnette(1850)

 

집의 내부는 가운데를 칸막이로 나누어 사람과 가축이 머무는 공간을 분리했으며, 부엌에서는 가축의 사료를 건조하고 사람의 음식도 함께 장만하였다.

 

대부분의 농촌 가정은 여름에 수영이나 했지 겨울에는 잘 씻지도 않아 전염병과 악취는 도시보다 더했으며, 18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정부와 의학계는 목욕을 권장하기 시작했다.

 

아동매춘

 

생각하기도 싫지만 외면할 수 없는 사실, 19세기 파리의 아동매춘이다.

 

오늘날과 같이 국가가 어린이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고, 미성년자에게도 성인과 같은 권리가 있다는 믿음은 19세기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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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동매춘 근절 공익광고 ©UK Barnardos Magazine(2005)

 

사춘기도 지나지 않은 어린 소녀들을 매춘으로 내몬 것은 가난이었다.

 

고아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학대가 일반적이거나 알코올 중독자가 있는 가정 출신들이었다. 당연히 어린 소녀들이 이런 일에 자발적으로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고 생계가 힘든 가족들에 의해 거리로 내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가족은 주변 사람들의 비난을 살 것이 두려워 거리에 딸을 버려버리기도 하였다. 결국, 그런 소녀들은 매춘을 평생직업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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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뿐 아니라 19세기의 대도시에는 거리로 내몰린 아이들이 많았다. 사진은 1876년 런던 거리 ©John Thomson


1800년대 후반까지 아동매춘은 번성하였고 대부분 어두운 골목이나 다리 밑에서 은밀하게 거래가 이루어졌다. 심지어 아동매춘 조직은 11~13세 정도의 소녀들을 고객의 집까지 배달(?)하기도 하였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대부분의 매춘부들은 17세 이상이었지만 그 매춘부들 중 21%가 이미 16세 이전에 매춘에 나선 것으로 밝혀졌다.

 

전염병

 

1832년 3월 말, 파리의 병원들은 환자들의 줄로 미어터지고 있었다.

 

가슴 통증과 두통, 구토 등 다양한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연이어 나타났고 대부분 1~2일 내에 사망했다. 콜레라(Cholera)의 창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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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콜레라를 표현한 일러스트 ©Le Petit Journal(1912)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누워서 죽을 수 있는 침상을 내어주는 게 전부였다. 단 2주일 만에 7천 명이 사망했고 6개월 동안 총 19,000명이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19세기 후반에는 결핵이 등장해 12,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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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는 팡틴(Fantine)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 2012)

 

19세기의 전염병들은 파리의 도시계획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고, 넓은 거리와 현대적인 배수 시스템을 갖추는 긍정적인 결과로도 이어졌다. 파리시는 1889년부터 전염병 발병 장소에 대한 소독과 위생교육을 강화했다.

 

구경거리가 된 시신들

 

1864년의 프랑스에서는 범죄로 인해 사망하거나 신원 미상의 시신은 법의학 연구소로 옮겨졌다.

 

이 법의학 연구소를 ‘모르그(시체공시소) 라고 불렀는데 여러 검사를 거쳐 사인과 신원을 밝혀내는 현대의 법의학과는 달리 당시는 공개를 통해 신원을 파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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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공시소의 홀


파리의 시체공시소는 센강(Seine River) 가운데의 시테섬(Ile de la Cité)에 있었는데, 당시 센강에서 건져올리는 변사체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그곳에 시체공시소가 자리잡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곳에 실종자를 찾으러 오는 가족들은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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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0년, 영안실에서 시체공시소로 실려오는 사망자

 

방문객의 대부분은 신문에 난 시신의 소식을 듣고 호기심에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대리석의 탁자 위에 시체를 눕히고 유리진열장 너머로 시체를 구경할 수 있는 시체공시소로 가족 단위로 구경을 가는 것은 당시 파리 시민들에게 놀이공원을 가는 것과 같았다.

 

특히 토막살인사건이나 신원 미상의 머리 없는 변사체에 관련된 기사가 실리기라도 하면, 시체공시소에는 하루 1만 명 이상의 관람객들이 몰려들어 사인이나 범인에 대한 추리의 토론장이 되기도 하였고, 근처의 도로는 음식을 파는 노점상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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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5년, 박물관처럼 보이는 시체공시소. 벽에 걸려있는 옷들은 사망자가 입고 있던 옷이다.


1880년대 후반, 센강에서 훗날
‘센강의 신원미상의 소녀(l’Inconnue de la Seine) 라는 데스마스크로 남겨질 변사체가 건져 올려졌다.

 

소녀는 몸에 전혀 폭행의 흔적이 없었던 이유로 자살로 추정되었고, 피부의 탄력으로 보아 16세 정도로 여겨졌으며 일반적인 시신들과는 다르게 신비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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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센강의 소녀(l’Inconnue de la Seine)

 

신원확인을 위해 신문에 공고를 내걸자 소녀의 시신을 확인한 사람들에 의해 그녀의 미소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많은 인파가 이 소녀의 미소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귀족 자제를 짝사랑하다 자살했다’는 등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로맨스 이야기가 떠돌았지만 결국 소녀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공시기한이 마감되어 매장 결정이 내려지자 시체공시소에 근무하던 한 병리학자가 몰래 그녀의 얼굴을 석고로 본떴다. 그렇게 소녀의 석고상은 수천 개의 복제본으로 만들어져 예술가들에게는 유행처럼 소장하는 작품이 되었고 많은 문학에 영감을 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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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센강의 소녀로 만든 조각상

 

또 익사한 그녀의 얼굴은 익사사고 방지를 위해 재탄생했다.

 

1958년, 노르웨이의 완구제조업체 사장인 아스문트 레어달(Asmund S. Laerdal)은 ‘구강 대 구강 인공호흡법‘ 훈련을 위해 유명한 여류 조각가 엠마 마티아슨(Emma Mathiassen)에게 의뢰하여 그녀를 모델로 ‘Resusci Anne‘이라는 심폐소생술 마네킹(CPR doll)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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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문트 레어달(Asmund S. Laerdal)과 Resusci Anne

 

그녀의 두상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의 수는 구조대원과 일반인을 포함해 현재까지 3억 명 이른다고 하는데, 이 심폐소생술 마네킹에 얽힌 사연을 듣는다면 응급 훈련에 조금 더 경건하게 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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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PR 훈련세트


한편, 파리의 시체공시소는 ‘도덕성에 위배되고 파리 시민의 정서함양에 해악을 준다’는 우려로 1907년에 폐쇄되었다. 하지만 시체공시소의 흔적은 법의학 연구소가 1921년 파리의 다른 곳으로 이전할 때까지 그 자리에 남아 사람들에게 불길한 곳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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