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영도 앞바다에 떠오른 아기와 엄마의 시신에 얽힌 사연
이야기의 배경
일제시대에 상류층의 남자와 연애 후 아이까지 낳았지만, 카페의 여급이라는 신분 때문에 남자 집안의 반대로 결혼을 하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던진 모자의 가슴 아픈 사건이다.
처음엔 아이의 시신만 발견되어 사건은 미궁으로 빠졌으나, 분명 온 동네가 떠들썩해서 사건을 접했을 텐데도 나타나지 않는 무심한 남자의 태도에 분노했는지 열흘만에 여성의 시체가 바다에서 떠오르며 내막이 알려지게 되었다.
– 애인이 양반인 까닭에
– 부모 거절로 결혼 못하고
– 애자(愛子) 업은 채 투해(投海) 자살
“그와 못 살 바에는 차라리 이 몸이”
도회지라는 복잡하고 난잡한 어두운 그늘에서 직업여성으로 살던 카페의 여급!
그녀는 미모의 남자와 사랑의 열매까지 맺어 부모의 승낙을 구하였으나 여급이라는 천한 신분과 생활로 인하여 완고한 부모와 그들 문중의 배척을 받다 못해 두 생명이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되어버린 사실이 부산 항구에 발생했다. 경찰에서는 20여 일을 두고 허둥지둥 범인을 추적하다가 겨우 실마리가 풀려 수산본부의 경관도 긴 한숨을 내쉬고 죽은 자에게 위로를 올릴 수 있었다 한다.
사건 내용은 지난 5월 20일 오전 10시, 목도 서조철공장 앞 해안에서 생후 2세의 남아 익사체가 포착되었다. 이 익사체를 발견한 부산 수상경찰서에서는 타살의 혐의가 농후해 복잡한 범죄의 한 가지 증거가 아닌가 하고 비상에 들어갔다.
▲ 서조철공소
의문의 실마리는 쉽게 풀리지 않고 갈수록 미궁으로 들어가 해결이 어렵다고 낙심을 하던 차에 지난 5월 30(卅)일에 전신이 모두 부패한 여자의 익사체가 또 하나 남부민정 방파제 해안에 포착되었으나 형체를 분간할 도리가 없어 경찰도 그 신분조차 알지 못하고 가매장을 해두었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가진 수상서 민완의 가타야마(片山) 형사는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다니면서 의문의 장본인을 찾아내기에 열중하던 나머지 지난 4일 밤에 보수정(현재의 중구 보수동) ‘베니쓰’카페에 가서 차 한잔을 마시고 그곳의 여급들에게 익사한 유아의 사진을 내놓고 “이 아이의 임자를 알겠냐”고 하였는데 천행(天幸)으로 이 곳의 모 여급이 “그 아이는 내가 잘 기억하고 있다”고 말문을 열어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하였다.
도시의 거리에서 살길을 찾아 자동차의 조수, 카페의 여급생활을 하면서 한 남자의 상대가 되어 정열이 가득 차게 된 여성이 있으니 그녀는 경북 달성군 동촌면 아양교 앞 김복인의 2녀 권소생(21)이라는 가녀린 여자였다.
소화 7년(1932년) 7월에 부평정 일륜이라는 카페에서 여급생활을 하면서 이 남자 저 남자에게 한없이 봉사하던 끝에 가정이 상류계급이요 백만장자의 자손으로 미모의 소유자면서 인쇄소에서 화공(畵工)노동을 하며 일륜에 출입하던 사나이. 부내 남부민정 542번지 이상범(25)이라는 남자와 사랑의 줄을 맺었다.
이후 양산 자동차부의 버스걸(버스 안내양)로서 양식을 구하다가 여의치 않자 시내 ‘베니쓰’, ‘스마트’, 마산의 ‘은하’등 카페 여급생활을 하면서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이에 서로 결혼을 하자 약속하고 여자의 집에선 승낙을 얻었으나 남자쪽인 남부민정의 토착 양반 이씨가 여급과의 결혼을 용인할리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이리하여 결혼의 꿈도 부모의 반대로 가망이 없어지고 남의 월급으로 생활을 하고자 작년 4월에 부산 본정 동부여관에서 3개월간 같이 살면서 7월 10일에 출산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남자가 뜻밖의 병을 얻게 되어 생활이 곤란해지는 바람에 다시 마산으로 갔지만 아이를 데리고 여급생활을 하기는 힘들었다.
결국 지난 5월 12일에 부산으로 와서 남자와 같이 살고자 최후로 그 부모의 집에 가서 결혼승인과 생활비를 청구하여 보았으나 완고한 양반의 집안에서 여급출신 며느리는 문둥이보다 더 싫은지라 결혼을 승인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그 여자는 5월 18일, 등에 아이를 업고서 종적을 감추어버렸던 것이다. 세상의 권세를 저주하며 완고한 부모의 간섭에 최후의 반항을 할 결심으로 천진난만하게 어머니의 등에서 춤추며 날뛰는 영희(2)를 데리고 만경창파가 내다보이는 그 동리 앞 방파제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어 들어갔다.
파도소리는 높으나 인적 없는 방파제 위에서 어머니의 젖을 배불리 먹여가지고 등에 업어 잠들인 채 모성애를 전적으로 발휘시켜 놓고 두 목숨이 한꺼번에 사라졌으니 그가 취한 행동은 투신자살!
▲ 현재의 영도
이리하여 아이의 시체를 목도에서 발견하여 사방으로 수사하였으나 실마리를 잡지 못하였는데 철천의 원한을 품고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여급의 혼은 사랑하던 남자가 시체조차 찾지 아니하고 모른 척하고 있는 것에 원망의 소리를 치기 위함이었던지 그 남자 집 앞바다에서 부패된 시체로 포착되었다.
그리하여 임자없는 표류시체라고 가매장을 한 지 3,4일 만에 우연히 그녀의 정체를 경찰이 탐지하여 의문의 실마리가 완전하게 풀렸는데 경찰은 남자를 검거하여 사실을 알고도 경찰에 말하지 않으며 곯려먹었다고 구류하여 취조 중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36.06.07】
해당 사건이 일어난 곳은 목도(牧島) 서조철공소 앞바다였다.
▲ 사건현장의 현재모습
서조철공소는 사이조 도시하치(西條利八)가 1906년 부산 부평동에 설립한 사이조철공소(西條鐵工所)로 1928년 영도로 이전했으며 이후 1937년 7월에 설립된 조선중공업에 합병되었다.
사이조철공소가 있던 곳은 영도 봉래동으로, 지금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가 자리하고 있다.
▲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목도(牧島) 또는 마키노시마(牧の島)는 일제시대에 영도를 칭하던 이름으로 신라시대부터 이곳에 말을 키우고 훈련시키는 말 목장이 있었던데서 유래한다.
▲ 영도조선소 위치
영도의 원래 이름인 절영도(絶影島)는 ‘그림자가 없는 섬’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이후 왜구의 노략질이 잦자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을 실시하여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섬’이 되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이곳에서 난 준마들이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는데서 유래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 영도구 거리의 절영마 조각상
이중 삼국사기에 성덕왕이 김유신의 손자 윤중(允中)에게 절영산마(絶影山馬) 한필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두번째 설이 유력하다. 현재는 영도구에서도 구의 상징을 ‘절영마’로 지정하여 거리 곳곳에서 조각상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