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기생 김산월의 ‘친자확인 소송’
‘솔로몬의 재판’이라 하면 구약성경의 솔로몬 왕이 아기를 낳고 다투는 두 여인에게 ‘아기를 둘로 나누어주라’고 판결한 재판을 일컫는다.
몸을 가르면 아기는 죽는 것이니 결국 한 여인이 ‘그냥 아기를 저 사람에게 주라’고 간청하게 되는데, 이는 모성애를 이용해 그녀가 친모라는 것을 증명하는 명판결이 되었다.
이에 오늘날까지도 난해한 소송에 내려진 현명한 판결을 ‘솔로몬의 재판’이라고 칭하거나 ‘솔로몬의 지혜에 버금가는 재판관의 판결이 기대된다’는 식의 문장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 솔로몬의 재판 © 니콜라 푸생(17세기)
기생의 친자확인 소송
아래의 기사는 평양의 김산월(金山月)이라는 기생이 자신이 낳은 아버지의 아이가 현재의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소송을 건 내용이다. 당시의 사회통념상 흔하지 않은 재판이어서인지 이를 두고 언론은 ‘솔로몬의 재판’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는 모습이다.
– 자식 쟁탈전(子息爭奪戰)
– 기생이 낳은 아들
평양 기생 권번에 기적을 두고 현재 부내 신창리(新倉里) 73번지 기생 김산월(金山月)이라는 김선부(金善婦, 23)는 부내 이기찬(李基燦) 변호사를 소송 대리인으로 부내 앵정(櫻町) 임모(任某)를 상대로 낸 인지무효(認知無効) 청구소송의 공판은 25일 오전 10시 동법원 제1호 법정에서 열렸는데, 워낙 기생의 아들 싸움이니만큼 일반의 인기는 방청석에 집주(集注)되었으나 증인의 불출두로 공판은 오는 6월 1일로 연기되었다.
소장의 내용은 피고 임희성이 대정 11년(1922년) 음력 11월 20일경부터 전후 약 1개월 동안 원고와 동침하였기 때문에 대정 12년(1923년) 9월 20일에 원고가 출생한 아들 김수덕(金水德, 5)을 자기 아들이라 하여 지난 3월 8일에 원고의 호적으로 제적을 시켰다.
하지만 원고(김산월)는 피고와 1922년 음력 11월 20일과 23일에 두 번 관계를 맺었을 뿐이요. 동년 9월부터 동년 12월까지 박모(朴某)와 관계를 맺어 동년 12월부터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은 것으로 피고의 아이가 아니라 하여 이미 호적에 올린 아들을 도로 내어 달라는 것인바, 문제의 수덕은 그동안 자기 어머니의 성을 따라 김씨로 외할아버지의 호적상 아들로 있어왔었으나 현재는 어머니의 피고가 된 임희성의 호적에 올라있으니 하늘은 그로 하여금 어떤 아버지를 지정하여줄 것인가 하여 일부 유식 계급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더라.
【동아일보 1927.05.27】
■ 기사를 요약하면 평양의 기생 김산월(본명 김선부)이 사생아를 낳아 자신의 아버지 호적에 올려 살고 있었는데, 임모라는 자가 자신의 아들이라며 호적에 올렸다. 하지만 김산월은 ‘진짜 아버지는 박모라는 사람’이라며 인지무효소송을 낸 것이다.
100년 전의 사회통념상 흔치 않은 재판이다 보니 여러 언론에서 흥미를 갖고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임(任)과 박(朴)이 쟁탈하는 명기 산월(名妓山月)의 아들
– 제각기 서로 내 아들이라고 평양지방법원에 재판 소동
이손님 저 손님에게 웃음과 노래를 팔며 세상을 건너는 기생을 어머니로 두고 그나마 부모를 부모로 바로 섬기지를 못할 뿐 아니라 어머니가 누이도 되고 할아버지가 아버지도 되었다가 김가가 임가로 되었다던지가 수개월만에 박의 아이라고 떠들게 되는 비극이 요새 평양 지방법원 인사부에 나타나 세상의 눈을 끌고 있는 사건이 있다.
그는 평양에서 명기의 이름이 있고 아이 잘 낳는다는 소문이 있는 평양부 벽암리 김산월 이란 기생의 아들 김수덕(6)으로 어미가 기생이니만치 오고 가던 길에 그가 출생한 것만은 대정 12년(1923년) 9월 중인데 그 아이가 출생되었을 때에 산월의 집에서는 곧 아비를 찾아주지 않고 출가하지 않은 딸에게 사생아를 만든다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민적에 올리되 김산월의 아버지 김봉국(金奉國)의 서자로 임씨라는 여자를 어미로 하여 민적에 올렸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별안간 평양부 앵정 임희성(任熈聖)으로부터 작년 겨울 중에 김산월을 상대로 실자 확인의 소송을 제기하고 김수덕은 자기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여 평양부 민적계에까지 두 사람이 출두하여 다툰 결과, 결국 김수덕은 임희성의 아들로 되고 김산월의 사생자로 김봉국의 호적에서는 제적이 되었다.
하지만 김산월은 다시 최근에 임희성을 상대로 인지무효의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그 내용인즉 “그 아이를 배었던 때 1922년 11년 9월부터 12월까지는 평양의 실업가 박모와 관계를 계속하여왔고, 그동안에 임희성과는 동년 11월 중에 겨우 두 번 관계를 하였는데 그때는 월경도 하지 않아 아이를 밸리가 만무하니 김수덕은 박모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난 1일에는 박모를 증인으로 호출하였으나 체면이 체면이라 출석하지 않아 다시 15일에 박모와 김산월을 불러 심리하게 될 것이라는데 사건이 너무 복잡해 세상의 주목을 끄는바 당일 방청을 금지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하며 임희성은 소생이 없고 현재 일본 화태도(樺太島, 사할린)에 있는 중이라더라.
【중외일보 1927.06.03】
■ 위 중외일보의 기사를 통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기생이라는 특성상 김산월은 낳은 아이의 생부가 누구인지 몰라 친부의 호적에 올려놓고 살던 중, 임희성이라는 자가 등장해 자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해 인정받았다.
하지만 곧 김산월은 ‘이 아이는 사실 평양의 실업가 박모씨의 아들이다’라며 인지무효소송을 낸 상황. 기사 내용을 보면 소송 이유가 퍼즐처럼 맞춰지는데, 임희성은 자신의 호적에만 아이를 올렸을 뿐 집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멀리 사할린에 있는 중이고, 박모씨는 ‘재력을 갖춘 실업가’라는 점이다.
세상의 이목을 끈 이 재판의 진행상황은 계속 언론에 의해 보도되었다.
– 나의 아들이다! 당신 아들 아니오
– 기생의 몸에서 낳은 아들을 내 아들 네 아들로 재판질 해
– 평양 법원의 진기한 소송(珍訴訟)
하루 건너 남편을 번갈아도는 기생이라 그 몸에서 낳은 아이의 아비가 분명치 않아 한 남편은 제아이라 하나 기생은 아니라 하고, 기생이 주장하는 아비는 본인이 부인하여 아이를 법정에 내세우고 아비라는 사람과 증인으로 검증을 하는 등 기생 김산월(金山月, 23)이 평양에 본적을 두고 일본 사할린에 거주하는 임희성(任熙聖)을 상대로 한 인지무효(認知無効) 소송을 걸었다.
김산월이 낳은 김수덕(金水德, 7)을 처음에는 자기 아버지의 아들로 하여 동생을 만들었다가 후에 사생자로 만들었던 것을 임희성이 자기 아이라고 자기 민적(호적)에 넣은 것으로 인하여 재판이 된 것인데, 기생이 말하는 아이 아비는 현재 평양의 실업가 박모로 그는 7년 전 가을부터 12월 말까지는 기생집에 다녔으나 자기 아이는 아니라 한다.
반면 기생은 임희성은 그해 11월 초순경에 단 두 번 다녔을 뿐이어서 아이가 12월 초생에 생겼으므로 확실히 박모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것인데 당일 법정에서는 박모와 아이와 임희성의 사진을 놓고 법관이 가지가지로 살폈으나 도저히 판단을 내릴 수 없다 하여 다시 혈액검사 등의 엄정한 과학적 감정을 하기로 하고 27일로 연기하였는바, 아이가 어머니 탓으로 아비는 있어도 어느 것이 참아버지인지 모르고 무심히 법정에서 장난하는 것은 실로 가련한 모습이었다.
【중외일보 1927.07.10】
■ 이어진 기사에서는 결국 혈액검사로 친자확인을 하기로 하였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한 세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재판의 진행상황이나 과학수사로 이어지는 것이 지금과 큰 줄기에서는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 법정에서 다시 검사
– 제자식 찾고자
평양부 벽암리(薜岩里) 72번지 기생 김선부(金善婦, 23)는 삼사 년 전에 자기가 낳은 아들 김수덕(金水德, 5)을 몇 번 관계도 업었던 임희성(任熙聖)이가 자기의 아들이라고 얼마 전에 호적을 옮겨가자 그 아이가 임희성의 아이가 아니요 오랫동안 관계를 가진 재산가 박태홍(朴台弘)의 아들이라고 하여 소송을 걸었다.
그녀가 임희성을 상대로 한 재판은 평양 지방법원에서 오랫동안 재판관들의 머리를 썩이며 원고의 주장대로 얼마 전에 박태홍과 문제의 김수덕을 호출하여 그 인상(人相)을 대조해 보았으나 진위를 알 수없어 5일 다시 공판이 열렸다.
하지만 유일한 증거는 아이인 김수덕뿐이고, 그의 어미가 원고인지라 단순히 그녀의 증언을 믿을 수도 없는 것이라 하여 마침 조선에서는 흔치 아니한 혈액감정(血液勘定)을 하기로 되었다는데 이에 대하여는 평양 재판소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일뿐만 아니라 이런 재판은 옛날 『솔로몬』의 지혜가 아니고는 하기 어려운 일임으로 재판관들도 상당히 여러 가지 방면으로 연구를 하며 초려를 하는 중이라는데.. (하략)
【동아일보 1927.10.08】
■ ‘솔로몬의 지혜’가 언급된 기사로 요즘 같으면 DNA 검사로 금방 끝날 소송이 증인들의 증언만으로 공방을 벌이며 길어지는 모습이다. 위 기사들에 언급되어 있듯이 이미 20년대에도 혈액검사는 할 수 있었지만 재판관들은 주목받는 재판에서 굳이 선례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어서 고심 중이다.
– 자식 하나에 여러 아비
– 필경 혈액을 검사
– 기생이 낳은 아비모를 자식
– 평양법원 창설이래 최초
평양부 임희성은 평양 명기 김산월이라는 기생을 상대로 실자 확인 청구소송을 제기하여 금년 봄 이래로 여러 차례 개정되었으나 양편에서 각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진술하였음으로 재판장도 할 수 없이 그 어린아이의 아버지가 과연 누구인지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고인 김산월이가 아이의 아버지는 평양부 양별리에 사는 박태홍이라는 사람이 분명하다고 증인으로 신청을 하였으므로 전기 증인을 호출하여 심문키로 하였던 바 지난 30일 오전 10시경에 이토 재판장의 주심으로 박태홍을 심문한 결과 역시 증거가 충분치 못함으로 재판장으로부터 전기 증인과 어린아이의 혈액 검증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일 4시경에 평양 자혜의원으로 이토 재판장이 김서기를 대동하고 출장하여 혈액을 감정한 뒤 오는 12월 7일에 확정판결이 있을터라는 바 혈액검사로는 평양 재판소가 생긴 이후로 처음인 기이한 사건이라더라.
【조선일보 1927.12.02】
■ 위 기사가 이 사건에 대한 마지막 기사로 12월 7일 혈액검사로 최종 판결을 예고하고 있는데, 이후의 보도는 없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김산월이 월경과 임신기간으로 주장한 논리도 수긍이 가고, 재력가 박태성은 사회적 체면 때문에 몇 번이나 법원 출석을 미루는 타입이니만큼 자신이 ‘기생과 낳은 사생아’를 보도하는 것을 막고 싶었을 것이다.
즉 주목받던 사건의 최종 보도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박태홍이 수덕의 친부’라는 결과가 나왔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이며, 결국 수덕은 임수덕, 김수덕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박수덕이 되었을 것 같다. 어쨌든 기생이라는 직업상 오히려 시대를 앞서 간 소송을 대중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거리낌 없이 제기할 수 있었던 아이러니한 재판이었다.